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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김소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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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소엽 (25·끝) “주님, 죽음의 그날까지 영혼 울릴 詩心 주소서”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제자와 후배 동료들이 마음을 모아 ‘고희기념문집’을 내주었고 이강철, 김예소리씨가 나의 시를 직접 낭송한 CD음반을 만들어 봉정해 주었다. 우리나라 전통 인쇄기법인 활판인쇄로 시 100편을 담은 시선집 ‘그대는 나의 가장 소중한 별’, 문학평론가의 논평과 시인들의 평설, 박사학위 논문을 함께 묶은 ‘논총집’까지 총 3권이 한꺼번에 출간돼 지난 1월 7일 서울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출판감사예배를 드렸다. 신촌성결교회 이정익 목사님의 은혜로운 설교로 시작된 출판감사예배에는 200여분이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축사를 맡아주셨던 곽선희 목사님, 황금찬 선생님, 유재건 장로님을 비롯해 김삼환 목사님, 김동길 박사님, 이어령 전 장관님, 정근모 장로님, 김동선 강일구 홍..
[역경의 열매] 김소엽 (24) 눈물과 기도로 키운 딸 “믿음의 사위 어때요?” 서윤이가 미국 남가주대학에서 석사과정을 할 때 홍남표 목사님이 인도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나가고 있었다. 목사님은 석·박사 코스 학생들을 대상으로 매주 금요일 오후 성경을 가르치며 예배를 인도하셨다. 내가 그 모임 강사로 초청을 받았다. 50∼60명의 학생들이 준비찬송을 하고 있었다. 찬양을 리드하는 한 남학생이 내가 작사한 ‘부서져야 하리’란 곡을 기타로 치며 찬양했다. 그 학생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 나는 서윤이를 낳고부터 늘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목사님 장로님 총장님 교수님에서부터 재벌가 자제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곳에서 혼담이 오갔지만 서윤이는 단호하게 ‘노’ 했다. 믿음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오직 믿음만 보는 딸의 신앙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딸은 언제나 아빠처럼 신..
[역경의 열매] 김소엽 (23) 癌과의 사투속에도 “주님 일은 결코 미룰 수 없다” 몸을 너무 혹사했던 것일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암 진단을 받았다. 그동안 내 몸에 너무 소홀했다. 제때 먹여주지도, 재워주지도 않고 돌보지 않았다. 몸은 하나님이 주신 성전인데 그 몸을 혹사하고 지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됐다. “하나님께서 나를 쉬게 만드시려고 이런 기회를 주셨구나.” 예상외로 마음이 담담했다. 바로 입원하라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각종 검사 후 월요일 아침에 수술이 잡혔다. 그런데 그 주일에 교회 간증 집회가 잡혀 있었다. 나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주일날 간호사 몰래 옷을 갈아입고 나가 예배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 어떤 때보다 은혜로운 예배였다. 물론 간호사에게 혼쭐은 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다 싶다. 다음날 새벽 6시. 정진경 목사님과 김상원 대법관님이..
[역경의 열매] 김소엽 (22) “한국교회 질적 성장 돕자” 실천신대 설립에 앞장 나는 세계 여러 나라를 날아다니며 간증과 특강을 인도했다. 특히 호주 시드니장로교회에서 주일예배 인도 중 내가 좋아하는 윤동주의 ‘서시’를 낭송했는데, 마침 그 예배에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권사 부부가 참석했었다. 그 만남을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또 LA영락교회에서 집회를 마친 뒤 영문과 동기동창인 최영자 권사도 만났다. 텍사스 오스틴에서 기독교한인방송에 출연했는데 방송을 보고 보성여고에서 함께 근무했던 박화자 선생 부부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 또한 얼마나 반가운 만남인가. 뿐만 아니라 홍정길 김진철 목사님과 함께 참석했던 로마 코스타 집회에선 수많은 젊은이들의 뜨거운 기도 열기에 큰 감동을 받았다. 로마 교회에서 간증을 마치고 제자를 만났던 일 등 하나님은 기적 같은 만남을 계속 이어주셨다. 그..
[역경의 열매] 김소엽 (21) 문화선교 19년… 복음 담은 ‘힐링 예술’로 승화 문화선교의 사명을 갖고 뛰는 크리스천 문화·예술인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황금찬 나채운 전규태 이성교 유승우(문학), 박인수 오현명 김자경(음악), 육완순 조승미 박명숙(무용), 정재규 김병종 최병상 유명애(미술), 박상균 유경선(사진), 김기승 홍덕선 조용선(서예), 문고헌 강계식 강만희 박종철(연극), 김정철 이현삼 최병창(건축), 임동진 한인수 정영숙(연예), 황대식(국악), 신영균 이기원 정종화(영화) 등 일일이 이름을 다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예술가들이 분야별로 의욕을 갖고 사역했다. 문인선교회에서는 해마다 국민일보와 기독신춘문예 공모를 통해 많은 기독 작가들을 발굴했다. 또 치유시집을 발간해 병원, 소년원, 교도소 등 소외지역에 시집을 무료로 전하며 시와 친미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미술..
[역경의 열매] 김소엽 (20) 주님께 받은 새 소명 “문화선교 일꾼이 돼라” 1990년대 초 KBS 라디오 프로그램 ‘밤과 인생 이야기’를 2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하고 방송국을 나서면 새벽 1시. 여의도의 밤공기는 싸늘했다. 근처 포장마차에서 따뜻한 우동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급히 마포 집으로 와서 밀린 원고를 쓰고 나면 훤하게 동이 터오른다. 일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았다. 92년에는 기독교방송 ‘새롭게 하소서’도 맡게 됐다. 고은아 권사가 개인 사정으로 진행을 그만두게 되면서 방송국에서 진행을 맡아 달라고 연락이 온 것이다. 첫 시집의 인세가 거의 줄어들 때가 되니 하나님은 방송 일을 통해 생활을 이어가게 하셨다. 나는 당시 극동방송과 기독교방송에서 간증 칼럼을 진행하면서 믿음의 형제·자매를 많이 만났다. 그들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
[역경의 열매] 김소엽 (19) 기독 여성문인들 간증연극… 1억5000만원 대박이 남편이 떠나고 살 길이 막막했다. 6개월을 누워만 있다 보니 은행 대출 이자도 못 갚아 당장 집이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때 육군사관학교 상담교관 시험에 합격해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근무시간은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였지만 계속되는 생도들의 상담 요청에 밤 12시가 되어서야 퇴근했다. 젊고 패기 넘치는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나의 슬픔도 조금씩 치유되는 것 같았다. 순수한 열정을 가진 생도들로부터 많은 위로와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중학생이었던 딸은 늦은 나의 귀가 때문에 어두운 집에 홀로 남아 사춘기를 보내야 했다. 늘 그것이 마음에 걸렸던 나는 결국 사표를 냈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남편의 2주기 추모 감사예배는 나의 신앙고백이었다. 고통 가운데 기도로 올려진 시집이 감..
[역경의 열매] 김소엽 (18) 가택연금 DJ도 감명 받았던 ‘그대는 별로 뜨고’ 십자가가 아니었던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었겠는가. 예수께서 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이야기는 교회를 다니면서 수백 번도 더 들었던 이야기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사실을 머리로만 알았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데 30년이 걸렸다면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닫기까지 40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진정 가슴으로 내가 그 진리를 받아들인 것은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슬픔의 강을 건너고 고뇌의 산을 넘고 나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절규했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에 응답지 않은 하나님의 무한 아픔, 예수님이 완전히 순명하기까지 하나님의 침묵, 나는 그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