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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홍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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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덕선 <10·끝> “백지에 성경을 쓸 때마다 말씀의 무게 실감” 홍덕선 장로(왼쪽)가 2007년 1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주최로 열린 ‘2007 한국교회의 밤’에서 한기총 문화예술선교대상 예술선교부문을 수상한 뒤 가족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환갑을 넘기고 나서도 서예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다는 다짐에는 변함이 없었다. 2007년 발족한 한국기독교서예협회는 지금까지 내 사역의 보루가 되고 있는 단체다. 이 단체는 한국미술인선교회에서 독립한 기구로 기독 서예가 60여명이 가입돼 있다. 한국미술인선교회에서 서예 부문을 따로 독립해 별도의 단체를 만든 건 서예를 통한 선교를 좀 더 치열하게 전개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단체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회장을 맡아 협회를 이끌고 있다. 설립 첫 해부터 매년 협회전을 개최했고, 2009년부터는 기독 서예가 발굴을 위해..
[역경의 열매] 홍덕선 <9> 기독교 문화 전파 위해 ‘예술 선교’ 단체 이끌어 홍덕선 장로(앞줄 왼쪽 네 번째)가 1995년 ‘제8회 기독교문화대상’을 수상한 뒤 촬영한 기념사진. 1992년 9월 한국예술인연합선교회가 발족하면서 나의 사역도 새롭게 시작됐다. 특히 단체 산하에 있는 한국미술인선교회는 크리스천 서예가로서 본격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든 활동의 새로운 거점이었다. 나는 한국미술인선교회 초대 회장에 선임됐다. 부회장에는 당시 이화여대 미대 학장이던 최병상 교수가 임명됐고 내로라하는 크리스천 작가들이 단체에 가입했다. 우리는 발족 이듬해인 93년 12월 서울 이화여대 미술관에서 ‘제1회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을 개최했다. 동양화 서양화 서예 조각 등 각 부문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상대로 공모를 진행해 약 80명에게 상을 수여했다. 이 시상식은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맥을 이어오..
[역경의 열매] 홍덕선 <8> “성경 말씀만 쓰겠다”… 본격 기독서예가의 길로 홍덕선 장로(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1984년 5월 ‘제3회 춘파 홍덕선 서예 개인전’을 열고 지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78년부터 14년간 한국기독교미술인선교협회에 몸담으면서 벌인 갖가지 활동은 정말 보람찬 일이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를 세상을 위해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원이 150명이 넘었는데, 나는 단체에 이름만 걸쳐놓는 수준이 아니었다. 협회가 하는 일이라면 항상 발 벗고 나섰다. 특히 85년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었던 전시회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다. 85년은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지 100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다채로운 기념사업을 벌이던 해였다. 협회에서도 이를 기념해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 국제미술전’을 개최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신 축복에 감사하며 ..
[역경의 열매] 홍덕선 <7> 예술 통해 하나님의 사랑 알리기 14년간 사역 홍덕선 장로가 1980년 4월 서울 인사동 예총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건물 입구에 그의 전시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나는 1978년 서예학원을 차렸다. 학원 이름은 내 호(號)를 딴 ‘춘파서예학원’.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앞 한 상가건물 2층에 위치한 학원이었다. 66.1㎡(약 20평) 남짓한 아담한 학원이었지만 개원하자마자 수강생이 몰렸다. 학원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매달 적을 때는 50∼60명, 많을 때는 100명 넘는 수강생이 등록했다. 매일 저녁이면 학원은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퇴근한 뒤 학원을 찾는 직장인이 많았다. 낮에는 한국도로공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수강생을 가르치고, 밤에는 서예가로서 내 작품 활동에 매진하는 날이 이어졌다. 젊었으니..
[역경의 열매] 홍덕선 <6> 국전 첫 입상 이후 번번이 고배… 오자 시비까지 홍덕선 장로(왼쪽)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1975년 9월 촬영한 가족사진. 한국도로공사에서 일하던 시절, 내 서예 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사내에 퍼지면서 점심시간을 활용해 직원들을 상대로 붓글씨를 가르치게 됐다. 회사에서 가장 낮은 직급의 직원이었지만 서예 시간만큼은 달랐다. 사장도, 이사도 수업이 시작되면 나의 제자였다. 1970년대는 정부가 국민들을 상대로 각종 동호회 활동을 장려하던 시기였다. 이런 배경 덕분에 꽃꽂이 바둑 등과 함께 서예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컴퓨터나 타자기가 많이 활용되지 않던 시기여서 당시 사람들은 글씨를 잘 쓰는 걸 엄청난 자산으로 여겼다. 원곡(原谷) 김기승(1909∼2000) 선생과의 인연도 계속됐다. 일주일에 한 차례 선생의 집을 방문해 서예를 배웠다. 당시 선생..
[역경의 열매] 홍덕선 <5> 내 주변 사람들 잇따라 예수 영접하는 ‘은혜’ 홍덕선 장로(왼쪽)와 아내 안순복 권사가 1971년 4월 19일 결혼식에서 하객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다 . 내가 지금도 신기하게 생각하는 건 나를 시작으로 차례로 내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점이다. 여동생이 아프면서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친척들 대부분이 하나둘씩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 됐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를 만난 시기는 군에서 제대한 1970년 6월이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서울 신길동에서 자취를 했는데, 아는 누님이 중매를 서겠다고 나섰다. 같은 동네에 있는 아내의 집을 찾아가 소개를 주고받았는데,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아내는 젊은 시절 정말 예뻤다. 처음 본 ..
[역경의 열매] 홍덕선 <4> ‘훈련소 유급’ 고난 뒤 선망하던 부대에 배치돼 홍덕선 장로가 육군본부에 복무하던 시절 서예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 스무 살쯤 됐을 때다. 나는 내 호(號)를 직접 지었다. 봄 춘(春)에 언덕 파(坡)를 합친 ‘춘파’. 온갖 꽃이 만발하는 봄의 언덕처럼 생기가 넘치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될 리는 만무하다. 누구나 그렇듯이 내 삶에도 크고 작은 고난이 끊이지 않았다. 1967년 7월, 나는 군에 입대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역경이 찾아왔다. 사격훈련에서 낙제점을 받는 바람에 그만 유급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고동락한 동기들은 자대에 배치되는데 나 혼자 덩그러니 훈련소에 남아 다음 기수 훈련병과 또다시 훈련을 받아야 했다. 당시 느낀 자괴감은 엄청났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 자신이 너무 한..
[역경의 열매] 홍덕선 <3> ‘취업 알선’ 믿었다가 송아지 판 목돈 사기 당해 홍덕선 장로(가운데)가 1980년 4월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스승인 원곡 김기승(오른쪽)과 함께 촬영한 사진. 1965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나의 진로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당시 서울에는 6촌 형님이 살고 계셨는데 “서울에서 먹고 살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내 특기는 글씨를 잘 쓰는 거였으니 펜글씨를 배워보기로 마음 먹었다. 신문을 보고 찾아간 펜글씨 학원은 서울 을지로3가에 위치한 ‘중앙펜글씨학원’이었다. 한 달쯤 다녔을까. 어느 날 학원 강사가 나를 불렀다. “너는 글씨를 잘 써서 가르칠 게 없다.” 결국 그해 4월 나는 충남 예산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런데 얼마 뒤 학원 원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사로 학생들에게 펜글씨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