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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김소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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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소엽 (6) 도스토옙스키 탐독 후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 당시 이화여대 영문과 학생들은 경기·이화여고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거기에 끼지 못해 소외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오히려 초동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지방 출신의 설움을 달랬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교회 성가대로 봉사했다. 교회는 언제나 따뜻했고 어머니 품 같았다. 초동교회 성가대는 성탄절이면 성도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성가를 불렀고 우리는 성도들로부터 감사 선물을 받았다. 한번은 장로님이 새벽에 성가대원 모두를 집으로 불러 떡국을 끓여주기도 했다. 2층 넓은 마룻방에 꾸며진 성탄트리에 반짝이는 전구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지금도 그날의 정겨움이 눈에 선하다. 그때 성가대에서 함께 봉사했던 단짝 김남순은 파키스탄에 선교사로 갈 결심을 하고 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
[역경의 열매] 김소엽 (5) “하나님 도와주세요” 간절한 기도에 대여장학금이 우리 집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첫 학기 등록금만 대주면 나머지는 장학금으로 해결하겠다고 아버지와 약속을 하고 대학에 입학했다. 사실 아버지는 대학에 보내지 말라는 새엄마와 밤새 싸우셨고 우연히 내가 그 소리를 들었다. 거기에 대고 등록금을 요구할 수 없었다. 당장 2학년부터는 장학금을 받아야 했다. 나는 과 사무실을 여러 번 찾아가 장학금을 신청했지만, 나처럼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어려운 학생들이 많아 번번이 떨어졌다. 등록기간이 마무리되고 추가 등록을 한 주 앞둔 상태였다. 대강당 큰 채플홀에 엎드려 엉엉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어렵게 들어온 학교를 중도에 포기할 순 없었다. 이석곤 과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과 사무실로 가면 조교 언니가 들여보내주지 않기 때문에 직접 동대문에 위치한 선생님 댁..
[역경의 열매] 김소엽 (4) 시인 꿈 이루려 사범학교 마치고 다시 대학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교회를 더 열심히 다녔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조창석 목사님이 선화감리교회(현 하늘문교회)에 시무하셨다. 나는 주일학교에서 성탄절을 맞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맞춰 무용을 하고 연극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다. 주님은 내게 더 없는 요람이요 평강의 품이었다. 하나님 때문에 나는 어머니를 잃고도 학업에 정진하며 모범생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대전사범학교 전기 시험을 보았다. 사실 떨어지기를 바랐으나 수석으로 합격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사범학교를 다니게 됐다. 그곳에서 시의 첫 스승인 한성기 선생님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사범학교에서 3년간의 교육은 나의 ..
[역경의 열매] 김소엽 (1) 아들 잃은 어머니, 하나님 만난 뒤 눈물이 감사로 전도서의 기록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극동방송에서 ‘하나되게 하소서’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을 무렵 국민일보로부터 ‘역경의 열매’를 집필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나와 함께 일하던 기독여성 문인들이 역경의 열매를 썼으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나이 쉰도 안 된 마흔 중반에 간증을 한다는 것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뿐이라 일흔이 넘으면 쓰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대로 일흔이 넘어 이제 말할 때가 된 것이라 생각하고 조심스런 마음으로 이 글을 집필하게 됐다. 나는 세상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교회와 함께했고 하나님과 함께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태신앙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태어날 무렵은 일제 말기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이 심했던 때였다. 내가 살고 있던 충남 논산 양촌면 석서리 산골에는 30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