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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김소엽

[역경의 열매] 김소엽 (23) 癌과의 사투속에도 “주님 일은 결코 미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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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너무 혹사했던 것일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암 진단을 받았다. 그동안 내 몸에 너무 소홀했다. 제때 먹여주지도, 재워주지도 않고 돌보지 않았다. 몸은 하나님이 주신 성전인데 그 몸을 혹사하고 지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됐다. “하나님께서 나를 쉬게 만드시려고 이런 기회를 주셨구나.” 예상외로 마음이 담담했다. 바로 입원하라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각종 검사 후 월요일 아침에 수술이 잡혔다. 그런데 그 주일에 교회 간증 집회가 잡혀 있었다. 나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주일날 간호사 몰래 옷을 갈아입고 나가 예배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 어떤 때보다 은혜로운 예배였다. 물론 간호사에게 혼쭐은 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다 싶다.

다음날 새벽 6시. 정진경 목사님과 김상원 대법관님이 오셨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말씀으로 위로해 주셨다. 그때 주신 말씀이 시편 50편 15절이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 새벽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두 분이 오시다니…. 나는 너무나도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다. 그러고 나니 마음에 평안이 왔다.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가는 나를 붙잡고 언니가 울고 있었지만 나는 편안했다. 오히려 언니를 위로했다. 육친의 진한 사랑이 전해왔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오후 2시 회복실에서 눈을 떴을 때 살아있는 내 모습이 대견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덤으로 사는 인생이오니 내 남은 생애가 주님께 영광되게 하소서.”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술을 받으며 했던 가장 큰 고민은 매일 두세 번씩 미국에 있는 딸과 통화를 하는데, 어떻게 모르게 수술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수술실 들어가기 전 딸과 통화를 하면서 오늘은 전화를 받지 못할 일이 있다고 집에 전화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여긴 딸은 잠도 안 자고 수없이 전화를 해댔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며 잠 한숨 못자는 딸의 성격을 알기에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목소리 톤을 높여 전화를 받았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목소리만 듣고도 다 안다고, 딸은 “엄마, 왜 어디 아파요?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라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런 딸을 야단쳐 따돌렸다. 사실을 알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학업도 중단한 채 한국으로 뛰쳐나올 게 뻔하기에 숨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다 마친 8개월 후 미국에 있는 딸에게 갔다. 다 빠진 내 머리를 보고 대성통곡하던 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정말 가슴 저리게 딸을 사랑한다.

2005년 11월 21일에 수술을 받았고 12월 20일부터는 항암 치료에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나는 해마다 연말에는 미국에 건너가 고어헤드선교회 주최로 한국 고아를 위한 모금 행사를 10년째 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이미 포스터에 이름이 나갔고 집회가 여러 곳 잡혀 도저히 취소할 상황이 안 됐다. 의사 선생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2주를 늦춰 이듬해 1월 3일부터 치료받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생명보다 더 중한 일이 무엇이냐”며 안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 수술 후 2주 만에 미국으로 날아갔다. 뉴저지의 극장에서 열리는 행사를 비롯해 소망교회 전하는교회 뉴저지장로교회 늘푸른교회 그레이스성결교회 등 미국 순회 집회를 마치고 12월 30일 귀국했다. 그리고 2006년 1월 3일부터 항암 치료를 받았다. 치료 중에도 군복음신문 칼럼과 집회는 모두 지켰다. 그런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그리고 5년 후 깨끗함을 인정받았다. 할렐루야!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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