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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김소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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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소엽 (17) 남편 떠난 지 100일, 그의 무덤 위로 쌍무지개가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꺼져가는 몸을 이끌고 벽제에 있는 남편 묘소를 찾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아무리 통곡을 해도 그 사람은 다시 살아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치 다시 돌아올 것만 같고 죽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나님을 원망하다 못해 돌이킬 수 없는 그의 죽음이 의사의 잘못인 것도 같고, 나의 잘못인 것도 같아 죄책감을 씻어 낼 수 없었다. 사람의 몸속 어디에 그렇게도 많은 눈물이 숨어 있을까.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운전을 하면서도 줄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밤에는 앞차의 브레이크 등이나 마주 오는 차의 불빛이 눈물에 어려 운전이 어려웠고 내 눈은 짓물렀다. 그가 가고 난 후 100일이 된 어느 가을 날, 큰 조카 세영, 딸 서윤이와 함께 산소를 찾았다..
[역경의 열매] 김소엽 (16) 미망의 나를 깨운 시편… 내 문학 행로의 등대로 장미가 피는 6월에 그를 처음 만나 장미꽃밭에서 결혼을 하고 13년을 함께 살다가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그는 장미가 다 지기 전에 서둘러 천국으로 가버렸다. 문리대 학교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동료 교수, 제자, 친인척 등 많은 사람이 참석해 마지막 가는 그의 길을 애도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찬양이 슬프고 아리게 연세대 교정에 울려퍼졌다. 한 달 후 학교에서 연구실을 정리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모든 인연이 끝난다는 허탈감에 더욱 마음이 애석했다. 5층 연구실 문을 열려고 남편이 남긴 열쇠 꾸러미를 보는데, 나와 서윤이가 매달려 웃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의 체취가 곳곳에 배어 있었다. 특히 책상 위에는 그가 마지막 펴놓고 읽었을 커다란 성경책이 보였다. 아침마다 학교에..
[역경의 열매] 김소엽 (15) 초교 5학년 딸 “아빠의 못다한 삶 내가 이을게요” ‘바다에 뜬 별’은 사실 목숨을 담보로 영감을 받아 쓴 시였다. 나의 이런 경험이 시로 탄생하기까지는 2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계속 나만 버림받았다는 느낌과 남편을 떠나보낸 아쉬움에 심한 슬픔과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어느 날, 딸 서윤이가 학교에서 오더니 강하게 말했다. “엄마, 이젠 그만 슬퍼하세요. 제가 있잖아요. 제가 아빠 뒤를 이어서 교수가 될 테니 저를 미국에 유학보내주세요.” 나는 깜작 놀랐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이 그렇게 당돌하고 단호하게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린 나이지만 아빠를 잃고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엄마를 어떻게든 위로하고 소망을 안겨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전기가 확 켜지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나에게는 남편이 사랑의 열매..
[역경의 열매] 김소엽 (13) “하나님 하나님, 제 남편에게 과로사라니요 미국 교환교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 가정은 그야말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남편은 학교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업무에 지쳐가고 있었다. ‘연세춘추’ 주간을 맡았는데, 1980년대 초에는 연세대가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다. 밤새워 기사를 쓰고 인쇄가 다 끝날 때까지 지켜있지 않으면 순식간에 기사를 바꿔치기하는 바람에 대학신문이 나오는 날은 밤샘 작업을 해야 했다. 게다가 연세상담소 소장까지 맡아 남편은 밤늦게까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강의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책임감이 강한 남편은 어느 한 가지 일도 대충 넘길 수 없었기에 많이 힘들어했다. 결국 남편이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하는 8일 동안은 피곤도 풀리고 아주 좋았다. 그는 퇴원을 재촉했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
[역경의 열매] 김소엽 (10) “한편의 詩를 남기더라도 영혼 울릴 시를 쓰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훌륭한 시부모님을 모시게 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감사했다. 더욱이 예수님 닮기를 힘쓰는 남편을 짝으로 주신 시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남편은 사소한 생활에서부터 예수님 사랑을 실천해 가는 사람이었다. 함께 시장에 가면 꼭 장을 본 모든 물건을 들어주는 짐꾼이었고 집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이를테면 밥 짓는 내 곁에서 마늘을 깐다든지 파를 다듬으며 하루 지낸 일을 이야기했다. 무엇보다도 남편은 학교에 출근하면 꼭 성경말씀을 하루 양식으로 삼았다. 말씀을 묵상한 뒤 집으로 전화했다. “여보 성경 몇 장 몇 절 펼쳐 봐. 오늘 주신 양식이야”라며 함께 말씀을 나눴다. 그는 칸트보다 정확하게 오후 6시면 퇴근해 저녁식사를 한 후 어김없이 가정예배를 드렸고 일찍 ..
[역경의 열매] 김소엽 (9) 시아버지 양석봉 목사, 세계 최초로 경목제도 입안 ‘당신의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는 직접적인 고백을 기대했던 나는 성구만 가득한 그의 편지에 실망했다. 화가 난 나를 보듬으며 그는 말했다. “언젠가는 당신에게 귀한 결혼 선물이 되길 바라오.” 신혼여행을 마치고 시댁에 들렀을 때, 시어머니는 “영재는 내가 예수님 다음으로 믿는 아들이니 네가 남편 뜻을 잘 받들어 본이 되는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라”고 말씀하셨다. 시아버님은 가훈에 대해 설명하셨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는 말씀을 잘 지켜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라.” 그 가훈 때문일까. 아버님은 유쾌할 뿐 아니라 유머까지 넘치셔서 언제나 집안을 화목하게 이끄셨다. 시아버지 양석봉 목사님은 강경상고를 거쳐 일제시대 때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은행에 입사하신 분이..
[역경의 열매] 김소엽 (8) 장미꽃 만발한 6월, 교정에서 만난 ‘나의 사랑’ 사범학교를 나온 나는 대학에서 교직과목을 택해 졸업 때는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재단이 영락교회인 보성여자중·고교에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미션스쿨이기 때문에 매일 아침 교무회의는 예배로 시작했다. 당시 김정순 교장선생은 영락교회 장로로 아주 멋쟁이셨다. 내가 부임해서 첫 월급을 타기 얼마 전 아버지께서 세상을 뜨셨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막내 딸 시집가는 것도 못보고 저 세상으로 가시다니…. 무엇보다도 첫 월급을 아버지 손에 쥐어 드릴 기회를 잃은 아쉬움이 월급을 탈 때마다 두고두고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생활지도주임으로 계셨던 김영숙 선생님(후에 보성여중 교장이 되심)은 “결혼을 하면 정말 아름다운 기독교 가정을 이룰 수 있을 텐데…”라며 마치 좋은 사..
[역경의 열매] 김소엽 (7) 연신원 2년의 깨달음 “문학작품도 큰 복음 도구” 다른 사람들은 산기도를 가거나 부흥집회를 통해 죄인임을 고백한다. 또 새벽기도회나 목사님 설교를 통해 죄인임을 깨닫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이 나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달리셨다는 이 간단명료한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 30년이 넘게 걸렸다. 내가 죄인인 것을 모르니 통회 자복하는 회개가 없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어도 수천번 넘게 들었을 내용이 한번도 가슴을 때리지 않았던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참 다채롭고 오묘하다. 목사님의 설교도, 부흥집회도 아닌 책을 통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게 복음의 첫 단계를 밟았으니 그분의 은혜가 어찌 오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학작품이 훌륭한 기독교 교육의 자료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