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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정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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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정영관 <7·끝> 카페서 시작해 청년 위한 ‘꿈이 있는 교회’ 세워 1983년 2월 완공된 중앙감리교회 모습. 중앙감리교회에서 목회하며 하나로빌딩의 지하공간을 교육관으로 사용했다. 지하실에 ‘제이씨하우스(J-C House)’라는 카페 형식의 청년교회를 만들어 교회학교 및 청년들을 위한 열린 예배를 시작했다. 교회 안에 또 다른 교회를 만든 것이다. 교회 청년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친구들을 초청해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하면 우리 교회 부목사면서 이 청년교회를 담당한 하정완 목사가 다가가 신앙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때가 1997년으로 서울 시내 최초의 청년카페였다. 학창시절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며 교회를 다녔던 나는 청소년과 청년 사역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송정미 최인혁 최덕신 좋은씨앗 등 유명 CCM가수들과 신인가수들을 초청해 공연도 했다. CCM 공연장이 없던 ..
[역경의 열매] 정영관 <6> 유흥가 뒷골목 있던 교회 옮겨 다목적 빌딩 신축 1981년 4월 철거되기 전의 중앙감리교회 모습. 만 4년간의 봉일천교회 목회를 마치고 1969년 3월에 서울 종로 한복판에 있는 중앙감리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다. 종로거리는 한밤중에도 네온사인 때문에 대낮처럼 밝았다. 교회에 들어오는 골목길에는 술집 여관 나이트클럽 카바레 등이 즐비했다. 신학대를 졸업한 뒤 줄곧 시골목회만 한 나에게 종로거리는 별천지였다. 나는 1969년 3월 16일(주일)에 ‘적신호 앞에 있는 한국교회’라는 제목으로 부임설교를 했다. 평소 80여명이 나왔었는데 부목사가 온다는 소식에 남자 49명, 여자 65명, 총 114명이 출석했다. 그리고 1년 후 담임목사가 됐다. 내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중앙감리교회는 1890년 초대 선교사인 아펜젤러에 의해 세워진 감리교의 모(母)교회 중 하나..
[역경의 열매] 정영관 <5> “자는 데 방해된다” 새벽종 막은 호랑이 이장님 경기도 파주 봉일천교회 건물 앞에 선 정영관 원로목사 부부의 모습. 신성교회를 떠나 다음 부임지로 간 곳은 경기도 파주의 봉일천교회였다. 이삿짐을 내려놓고 쉬고 있는데 밤 10시가 넘어서 한 여성 교인이 집에 찾아왔다. 손에는 고기가 들려있었다. “목사님, 예배시간에 대표기도 시키지 말아주세요. 그거 부탁드리려고 왔어요.” 고기는 청탁용이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재밌기도 했다. 넉 달쯤 뒤 그 교인이 수요 저녁예배의 대표기도를 할 차례가 됐다. 나는 주보 대표기도 담당자에 그분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곤 그분을 만나 이야기했다. 왜 공중기도를 해야 하는지,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초등학교 교사이고 믿음도 신실했던 그분은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
[역경의 열매] 정영관 <4> 교사 봉급 죄다 털어 천막 지붕 예배당 세워 정영관 원로목사가 교회 청년들과 직접 지은 신성교회. 건물 앞에 아이를 안고 있는 이가 정 목사의 아내다. 감리사에게 추천받은 교회는 충남 아산에 있었다. 주일 아침 일찍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 간 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찾았지만 교회는 보이지 않았다. 물어 물어 겨우 찾아간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한 농가였다. 사립문에 ‘신성교회’라는 작은 간판을 걸어놓고 주일마다 목회자도 없이 청년 둘이 대청마루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 교회는 1953년 9월에 기도처로 시작했는데 10년이 흐르는 동안 전담교역자를 구할 형편이 못돼 더 이상 교회를 유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건물도 없고 교인도 둘뿐이라 당연히 한 푼의 사례비도 없었다. “교감으로 있는 학교에서 월급을 받으니 내 생활비는 걱정하..
[역경의 열매] 정영관 <3> “생활비 못대 교역자 없는 곳 파송해 달라” 자청 충북 충주 금가면 유송교회의 모습. 교회 앞에 서 있는 이가 유송교회를 세운 교사 최옥란씨. 충북 충주 금가면 유송교회로 가는 길엔 작은 강이 가로막고 있었다. 교회에 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이 강을 건너야 했다. 이렇게 찾아간 교회는 작은 흙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만 얹은 채 창문도 없는 초라한 건물이었다. 유송교회는 마을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여교사가 세웠다. 이 여교사는 주일에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앞산 소나무 아래에서 함께 찬송을 부르고 성경공부를 했는데 아이들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장로였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땅을 빌리고 동네 청년들과 함께 흙벽돌을 쌓아 교회를 세웠다. 교인들은 10명도 채 안됐다. 나이가 제일 많은 한 집사님이 식사를 제공해주셨고 내가 머무를 사랑..
[역경의 열매] 정영관 <2> 교사 발령 포기하고 월급 적은 부목사로 부임 감리교신학대 신학과를 다니던 1950년대 중반의 정영관 원로목사.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바로 내가 갈 수 있는 교회는 없었다. 다행히 충남 지역에서 고등학교 교사 채용고시에 합격해 충남 서천고등학교 영어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신학교 3학년 때부터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야간에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쳤기 때문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당시 급여는 월 6600원이었다. ‘지금은 내가 목회할 교회가 없으니 3년만 교사를 하고 목회를 하자’는 생각으로 서천고 교장 선생님을 만나 부임 날짜까지 확정했다. 그런데 3일 후 논산제일교회에서 나를 찾아오더니 당장 다음 주부터 부목사로 오라는 것이었다. 생활비는 월 2000원에 쌀 두 말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무엇보다도 ..
[역경의 열매] 정영관 <1> “목사가 되고 싶어요” 고교 때 2년간 새벽기도 양복차림의 정영관 중앙감리교회 원로목사가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중앙감리교회 예배당에서 왼손에 성경책을 든 채 활짝 웃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여든 일생을 돌이켜보면 나도 참 바보처럼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를 여섯 번 옮겨가며 목회를 하면서 더 큰 교회로 가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끼니를 챙기기 어려운 형편에도 교회에 사례비를 올려달라고 요청하지도 못했다. 45년간의 목회를 마치고 2006년 은퇴를 할 때도 어떤 예우를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요즘 시대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나와 아내는 정말 바보천치였다. 그러나 나는 목사가 된 것을 평생 동안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사실 내 의지로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 이 역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으로 나를 사용하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