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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소엽 (13) “하나님 하나님, 제 남편에게 과로사라니요 미국 교환교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 가정은 그야말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남편은 학교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업무에 지쳐가고 있었다. ‘연세춘추’ 주간을 맡았는데, 1980년대 초에는 연세대가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다. 밤새워 기사를 쓰고 인쇄가 다 끝날 때까지 지켜있지 않으면 순식간에 기사를 바꿔치기하는 바람에 대학신문이 나오는 날은 밤샘 작업을 해야 했다. 게다가 연세상담소 소장까지 맡아 남편은 밤늦게까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강의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책임감이 강한 남편은 어느 한 가지 일도 대충 넘길 수 없었기에 많이 힘들어했다. 결국 남편이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하는 8일 동안은 피곤도 풀리고 아주 좋았다. 그는 퇴원을 재촉했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
[역경의 열매] 김소엽 (12) 미국서의 당찬 포부 “하나님 나라 한국을 알리자” 미국생활은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나는 국제부인회에 들어가 한 주에 한 번씩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했다. 앞서 일본인이 재패니스 팬케이크를 소개했는데 주변 반응이 시큰둥했다. 나는 불고기, 잡채, 빈대떡을 알렸다. 다들 맛있다며 외국 학생들에게 점심시간에 대접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한국인 교수 부인들과 밤새워 음식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식사를 판매했다. 모두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맛있다고 했다. 그렇게 음식을 만들어 판 수익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보태 어렵게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을 돕기도 했다. 또 서윤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5월 30일을 ‘한국의 날’로 정해 전교생에게 한국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뉴욕의 대사관에 연락해 우리나라를 알릴 수 있는 영상 자료를 얻으..
[역경의 열매] 김소엽 (11) 예수닮은 남편 좇아 내가 변화되니 세상 행복이 결혼하고 5년은 꿈처럼 행복했다. 그러나 한 남자의 부인이요,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데 만족하지 못한 나는 자아실현을 위한 갈망과 영적 고갈상태로 혼란을 겪으며 불만에 휩싸였다. 이때 연세대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종교성과 철학성을 더해 좋은 시를 쓰고 훗날 교수가 되기로 다짐하며 그 힘든 시간을 극복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내가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니 세상이 달라보였다. 꽃들이 웃고 나무들이 춤을 추며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까지 좀 모자란 듯 보였던 남편이 참 근사해 보였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아니 유아적 신앙을 가진 내게, 또한 미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인 내게 그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어쩌면 나에게 모자란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성..
[역경의 열매] 김소엽 (10) “한편의 詩를 남기더라도 영혼 울릴 시를 쓰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훌륭한 시부모님을 모시게 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감사했다. 더욱이 예수님 닮기를 힘쓰는 남편을 짝으로 주신 시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남편은 사소한 생활에서부터 예수님 사랑을 실천해 가는 사람이었다. 함께 시장에 가면 꼭 장을 본 모든 물건을 들어주는 짐꾼이었고 집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이를테면 밥 짓는 내 곁에서 마늘을 깐다든지 파를 다듬으며 하루 지낸 일을 이야기했다. 무엇보다도 남편은 학교에 출근하면 꼭 성경말씀을 하루 양식으로 삼았다. 말씀을 묵상한 뒤 집으로 전화했다. “여보 성경 몇 장 몇 절 펼쳐 봐. 오늘 주신 양식이야”라며 함께 말씀을 나눴다. 그는 칸트보다 정확하게 오후 6시면 퇴근해 저녁식사를 한 후 어김없이 가정예배를 드렸고 일찍 ..
[역경의 열매] 김소엽 (9) 시아버지 양석봉 목사, 세계 최초로 경목제도 입안 ‘당신의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는 직접적인 고백을 기대했던 나는 성구만 가득한 그의 편지에 실망했다. 화가 난 나를 보듬으며 그는 말했다. “언젠가는 당신에게 귀한 결혼 선물이 되길 바라오.” 신혼여행을 마치고 시댁에 들렀을 때, 시어머니는 “영재는 내가 예수님 다음으로 믿는 아들이니 네가 남편 뜻을 잘 받들어 본이 되는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라”고 말씀하셨다. 시아버님은 가훈에 대해 설명하셨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는 말씀을 잘 지켜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라.” 그 가훈 때문일까. 아버님은 유쾌할 뿐 아니라 유머까지 넘치셔서 언제나 집안을 화목하게 이끄셨다. 시아버지 양석봉 목사님은 강경상고를 거쳐 일제시대 때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은행에 입사하신 분이..
[역경의 열매] 김소엽 (8) 장미꽃 만발한 6월, 교정에서 만난 ‘나의 사랑’ 사범학교를 나온 나는 대학에서 교직과목을 택해 졸업 때는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재단이 영락교회인 보성여자중·고교에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미션스쿨이기 때문에 매일 아침 교무회의는 예배로 시작했다. 당시 김정순 교장선생은 영락교회 장로로 아주 멋쟁이셨다. 내가 부임해서 첫 월급을 타기 얼마 전 아버지께서 세상을 뜨셨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막내 딸 시집가는 것도 못보고 저 세상으로 가시다니…. 무엇보다도 첫 월급을 아버지 손에 쥐어 드릴 기회를 잃은 아쉬움이 월급을 탈 때마다 두고두고 내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생활지도주임으로 계셨던 김영숙 선생님(후에 보성여중 교장이 되심)은 “결혼을 하면 정말 아름다운 기독교 가정을 이룰 수 있을 텐데…”라며 마치 좋은 사..
[역경의 열매] 김소엽 (7) 연신원 2년의 깨달음 “문학작품도 큰 복음 도구” 다른 사람들은 산기도를 가거나 부흥집회를 통해 죄인임을 고백한다. 또 새벽기도회나 목사님 설교를 통해 죄인임을 깨닫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이 나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달리셨다는 이 간단명료한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 30년이 넘게 걸렸다. 내가 죄인인 것을 모르니 통회 자복하는 회개가 없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어도 수천번 넘게 들었을 내용이 한번도 가슴을 때리지 않았던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참 다채롭고 오묘하다. 목사님의 설교도, 부흥집회도 아닌 책을 통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게 복음의 첫 단계를 밟았으니 그분의 은혜가 어찌 오묘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학작품이 훌륭한 기독교 교육의 자료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도..
[역경의 열매] 김소엽 (6) 도스토옙스키 탐독 후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 당시 이화여대 영문과 학생들은 경기·이화여고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거기에 끼지 못해 소외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오히려 초동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지방 출신의 설움을 달랬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교회 성가대로 봉사했다. 교회는 언제나 따뜻했고 어머니 품 같았다. 초동교회 성가대는 성탄절이면 성도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성가를 불렀고 우리는 성도들로부터 감사 선물을 받았다. 한번은 장로님이 새벽에 성가대원 모두를 집으로 불러 떡국을 끓여주기도 했다. 2층 넓은 마룻방에 꾸며진 성탄트리에 반짝이는 전구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지금도 그날의 정겨움이 눈에 선하다. 그때 성가대에서 함께 봉사했던 단짝 김남순은 파키스탄에 선교사로 갈 결심을 하고 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