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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덕선 <5> 내 주변 사람들 잇따라 예수 영접하는 ‘은혜’ 홍덕선 장로(왼쪽)와 아내 안순복 권사가 1971년 4월 19일 결혼식에서 하객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다 . 내가 지금도 신기하게 생각하는 건 나를 시작으로 차례로 내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점이다. 여동생이 아프면서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친척들 대부분이 하나둘씩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 됐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를 만난 시기는 군에서 제대한 1970년 6월이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서울 신길동에서 자취를 했는데, 아는 누님이 중매를 서겠다고 나섰다. 같은 동네에 있는 아내의 집을 찾아가 소개를 주고받았는데,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아내는 젊은 시절 정말 예뻤다. 처음 본 ..
[역경의 열매] 홍덕선 <4> ‘훈련소 유급’ 고난 뒤 선망하던 부대에 배치돼 홍덕선 장로가 육군본부에 복무하던 시절 서예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 스무 살쯤 됐을 때다. 나는 내 호(號)를 직접 지었다. 봄 춘(春)에 언덕 파(坡)를 합친 ‘춘파’. 온갖 꽃이 만발하는 봄의 언덕처럼 생기가 넘치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될 리는 만무하다. 누구나 그렇듯이 내 삶에도 크고 작은 고난이 끊이지 않았다. 1967년 7월, 나는 군에 입대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역경이 찾아왔다. 사격훈련에서 낙제점을 받는 바람에 그만 유급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고동락한 동기들은 자대에 배치되는데 나 혼자 덩그러니 훈련소에 남아 다음 기수 훈련병과 또다시 훈련을 받아야 했다. 당시 느낀 자괴감은 엄청났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 자신이 너무 한..
[역경의 열매] 홍덕선 <3> ‘취업 알선’ 믿었다가 송아지 판 목돈 사기 당해 홍덕선 장로(가운데)가 1980년 4월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스승인 원곡 김기승(오른쪽)과 함께 촬영한 사진. 1965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나의 진로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당시 서울에는 6촌 형님이 살고 계셨는데 “서울에서 먹고 살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내 특기는 글씨를 잘 쓰는 거였으니 펜글씨를 배워보기로 마음 먹었다. 신문을 보고 찾아간 펜글씨 학원은 서울 을지로3가에 위치한 ‘중앙펜글씨학원’이었다. 한 달쯤 다녔을까. 어느 날 학원 강사가 나를 불렀다. “너는 글씨를 잘 써서 가르칠 게 없다.” 결국 그해 4월 나는 충남 예산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런데 얼마 뒤 학원 원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사로 학생들에게 펜글씨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이었다. ..
[역경의 열매] 홍덕선 <2> 교회친구들이 불렀던 ‘홍 장로’ 별명이 실제로 홍덕선 장로가 충남 예산농고 2학년에 재학할 때 찍은 증명사진. 홍 장로는 고교 시절에도 붓글씨로 유명한 학생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마을에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문맹(文盲)이 많았다. 주민 대다수는 농민이었다. 아버지도 농사꾼이었다. 다른 집과 다른 게 있다면 우리 집안이 양반 가문이어서 마을 주민들의 신망을 받았다는 점이다. 동네 사람들은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갔다. 주민들은 자식들이 전장에서 편지를 보내오면 편지를 들고 우리 집으로 달려와 아버지께 대신 읽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이들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어 답장을 보내는 것도 아버지의 몫이었다. 이처럼 시시콜콜하게 유년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이런 환경에서 자란 게 ..
[역경의 열매] 이상직 <1>“총선에서 실패 맛보게 하신 건 하나님의 뜻” 이스타항공 창업주인 이상직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3월 전북 전주의 국민연금공단 노조를 방문해 발언하고 있다. 올해 총선을 코앞에 두고 당내 경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흔히 말하는 실패를 맛봤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나를 더욱 단단하게 하시려는 뜻이리라 생각한다. 국민일보로부터 역경의 열매 제의를 받고 지난 시간들을 돌아봤다. 많은 추억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4·13 총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대 국회가 개원한 지 3개월이 되어간다. 나에 대한 호칭도 ‘국회의원’에서 ‘전 국회의원’으로 바뀌었다. 돌이켜보면 초선 국회의원으로서 혈기왕성하게 19대 국회에 입성했다. 평소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고 느꼈던 철학대로 ‘민생(乙)을 위한 정치’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정무위원회 활동을 하..
[역경의 열매] 김정란 <1> 17세에 단돈 100원 들고 고향 떠나 사회 첫 발 수입 명품 도자기숍을 운영하는 김정란 대표가 23일 경기도 성남의 푸른언덕 매장에서 도자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한여름의 강한 햇빛도 사라지고 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에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다음 달이면 이곳 청계산 입구의 ‘푸른언덕’ 주변은 온통 단풍으로 물들 것이다. 벌써부터 온 산을 붉게 수놓을 아름다운 풍경에 가슴 설렌다. 푸른언덕은 해외 명품 도자기 판매와 카페를 겸한 사업장이다. 내가 가꾼 두 번째 일터다. 상호는 같지만 30년 넘게 해왔던 출판유통 분야 사업이 아닌, 전혀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 푸른언덕 1층은 유럽풍 카페로, 2층은 세계 명품 도자기 전시 판매장으로 꾸몄다. 서울 인근에서 자연과 더불어 유럽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도록 아름다운 공간..
[역경의 열매] 정영관 <1> “목사가 되고 싶어요” 고교 때 2년간 새벽기도 양복차림의 정영관 중앙감리교회 원로목사가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중앙감리교회 예배당에서 왼손에 성경책을 든 채 활짝 웃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여든 일생을 돌이켜보면 나도 참 바보처럼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를 여섯 번 옮겨가며 목회를 하면서 더 큰 교회로 가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끼니를 챙기기 어려운 형편에도 교회에 사례비를 올려달라고 요청하지도 못했다. 45년간의 목회를 마치고 2006년 은퇴를 할 때도 어떤 예우를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요즘 시대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나와 아내는 정말 바보천치였다. 그러나 나는 목사가 된 것을 평생 동안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사실 내 의지로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 이 역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으로 나를 사용하신 것..
[역경의 열매] 홍덕선 <1> “붓글씨로 말씀 전하는 달란트 주심에 늘 감사” 기독 서예가 홍덕선 장로가 최근 서울 양천구 자택에 있는 서실(書室)에서 자신의 인생 역정을 소개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지난 6월 30일이었다. 내가 창립 때부터 이끌고 있는 한국기독교서예협회는 설립 10년째를 기념해 서울 종로구 백악미술관에서 ‘한국기독교서예협회전’을 개최했다. 협회 회원 34명이 출품한 작품을 내건 전시회였다. 한국미술인선교회에서 독립해 2007년 4월 발족한 한국기독교서예협회는 서예로 말씀을 전하는 기독 서예가들의 공동체로 신진 발굴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이날 전시회를 앞두고 예배를 드리면서 감정이 복받쳤다. 백악미술관이 있는 서울 인사동은 온갖 미신에 기대 만들어진 우상(偶像) 조각품이 난립하는 장소다. 그런 곳에서 주님을 찬양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새긴 작품을 내걸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