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경의 열매]김소엽

[역경의 열매] 김소엽 (9) 시아버지 양석봉 목사, 세계 최초로 경목제도 입안

728x90

‘당신의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는 직접적인 고백을 기대했던 나는 성구만 가득한 그의 편지에 실망했다. 화가 난 나를 보듬으며 그는 말했다. “언젠가는 당신에게 귀한 결혼 선물이 되길 바라오.”

신혼여행을 마치고 시댁에 들렀을 때, 시어머니는 “영재는 내가 예수님 다음으로 믿는 아들이니 네가 남편 뜻을 잘 받들어 본이 되는 믿음의 가정을 이루어라”고 말씀하셨다. 시아버님은 가훈에 대해 설명하셨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는 말씀을 잘 지켜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라.” 그 가훈 때문일까. 아버님은 유쾌할 뿐 아니라 유머까지 넘치셔서 언제나 집안을 화목하게 이끄셨다.

시아버지 양석봉 목사님은 강경상고를 거쳐 일제시대 때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은행에 입사하신 분이다. 은행 월급이 많아 아버님은 사는 것 역시 넉넉했다. 그러나 어린시절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설교를 듣고 은혜받아 아버님은 목회자의 꿈을 꾸셨다. 은행원으로 혼자 호의호식하며 사는 게 양심에 가책이 됐고 결국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뒤늦게 가장의 몸으로 1931년 서울신대에 입학하셨다. 전도단에 들어가 전국을 누비며 정남수 김익두 이성봉 목사님 등과 함께 장막전도를 펼쳤다. 평양 원산 신의주를 넘어 만주 용정의 국자가까지 가서 전도를 했다.

나팔, 북으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아버님은 트럼펫도 부셨다. 부흥집회를 통해 결신자가 많이 나오면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 31년 만주에서부터 전남 진도 섬에 이르기까지 10여년간 아버님이 세운 개척교회가 30여곳에 이른다. 34년 문준경 전도사(6·25때 순교)와 함께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 세운 임자교회도 그중 한 곳이다. 35년 서울신대 졸업 후 아버님은 꺼져가는 삼례교회로 파송받아 교회를 크게 부흥·발전시킨 후 다른 목사님에게 인계하고 다시 전주교회를 개척했다. 이후 평택교회 백암교회, 서울 신수동교회에서 시무하셨다. 아버님은 일제 말기, 탄압에 의해 교회는 폐쇄되고 잠시 수감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복음전파를 멈추지 않았다.

6·25 때는 교회 마루를 뜯어내고 지하실을 파서 3개월간 숨어 지내기도 했다. 그때 김유연 박형규 목사를 만나 잠깐 동안 함께 숨어 지내기도 했지만 그 두 분은 북으로 끌려간 후 소식이 없다. 9·28 수복 때는 한 인민군 장교가 교회로 들어와 아버님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자신도 황해도의 한 교회 신자였다고 했다. 아버님은 그를 숨겨주고 함께 기도를 했는데, 동네사람의 신고로 들통이 났다. 아버님은 당시 서툰 영어로 미군을 설득해 총살을 면하도록 했고 그 인민군 장교는 거제도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아버님은 초대 군목으로 활동하다 4대 군종감이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복음을 전하셨다. 포로들 중 하나님을 믿고 후에 목회자가 된 사람이 104명이나 됐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아버님이 지하실에 숨겨줬던 사람이다. 그가 후에 부여의 홍산교회에서 목회했던 이일수 목사다. 아버님은 당시를 회상하며 “정말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였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아버님의 큰 업적은 군종감 시절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해 국가 행사 때 기도로 시작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 육군사관학교에 교회를 세웠고, 군목 대령 예편 후에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경목제도를 입안토록 했다. 90세까지 시골 구석구석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전도한 시아버지 양석봉 목사님은 99년 92세의 일기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죽도록 충성하고 봉사하셨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