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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김소엽

[역경의 열매] 김소엽 (10) “한편의 詩를 남기더라도 영혼 울릴 시를 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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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훌륭한 시부모님을 모시게 된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감사했다. 더욱이 예수님 닮기를 힘쓰는 남편을 짝으로 주신 시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남편은 사소한 생활에서부터 예수님 사랑을 실천해 가는 사람이었다. 함께 시장에 가면 꼭 장을 본 모든 물건을 들어주는 짐꾼이었고 집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이를테면 밥 짓는 내 곁에서 마늘을 깐다든지 파를 다듬으며 하루 지낸 일을 이야기했다. 무엇보다도 남편은 학교에 출근하면 꼭 성경말씀을 하루 양식으로 삼았다. 말씀을 묵상한 뒤 집으로 전화했다. “여보 성경 몇 장 몇 절 펼쳐 봐. 오늘 주신 양식이야”라며 함께 말씀을 나눴다.

그는 칸트보다 정확하게 오후 6시면 퇴근해 저녁식사를 한 후 어김없이 가정예배를 드렸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평생 야행성으로 살아온 나와 엇갈리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그는 새벽예배를 거르지 않았고 하루를 기도로 시작했다. 여행 필수품으로 성경을 챙기는 그는 하나님 제일주의의 절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정다감한 그는 학교에서 좋은 곳에 가서 회식을 하면 그 주일이 다 가기 전 나를 불러내 함께 점심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장 예쁜 모습으로 차려입고 가서 함께 점심을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중 딸 서윤이가 태어났다. 남부러울 게 없는 잉꼬부부에다 딸까지 주셔서 너무 행복했다.

그러나 그레고리 펙보다 잘생긴 그의 외모는 5년이 지나니 볼품이 없어지고 전임강사 월급의 박봉을 쪼개 쓰다보니 나는 친구들과 비교하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처신을 보니 매사 약간은 모자란 듯 보였다. 말석이라 직장에서 시간표 편성을 담당하던 그는 다른 교수님들에게 좋은 시간을 다 빼어 주고, 자신은 남는 시간을 ‘땜빵’하듯 월요일 첫 타임이나 토요일 시간을 맡았다. 그러다보니 주말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결혼 전 찍은 사진만 보더라도 그는 키가 커서 뒷줄에 서는 것이 이해는 됐지만 매일 앞사람에게 얼굴이 가려 제대로 된 사진이 거의 없었다. 하도 답답해 “당신은 사진 하나도 제대로 찍은 게 없다”고 타박했다. 남편은 “그게 어떻소? 나는 좋은데…”라며 반응했다. 정색을 하며 “그 말이 정말이냐”고 따지듯 묻는 내게 남편은 “사진을 뭐 나보려고 찍소? 봐요. 내 친구가 내 앞에서 얼마나 버젓하게 잘 나왔나”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참 어의 없는 남자였다.

축구를 볼 때도 우리는 어긋났다. 골이 들어간 순간 신나서 박수를 치는 나와 달리 남편은 슛을 하도록 볼을 몰아 준 어시스트 플레이어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좌우간 어긋난다 싶으니까 매사가 다 나와 달라 보였다. 그런 그에게 나의 일생을 맡긴 실망스러움에 한동안 우울증에 빠졌다.

나에게는 평범한 아낙이 아닌 훌륭한 시인이 되려는 꿈이 있지 않았던가. 어느 날 정신이 버쩍 들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일생을 달려왔는데 내가 저 사람에게 빠져 여기까지 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실 꿈을 접은 게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대가로 불리는 미당 서정주, 박두진, 구상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시를 배우지 않았던가. 등단을 하자. 나는 드디어 78년 한국문학을 통해서 등단했다. “여보 한 편의 시를 남겨도 좋으니 영혼을 울릴 만한 시를 남기시오.” 시의 깃발을 휘날리는 나에게 남편이 한 말이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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