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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소엽 (4) 시인 꿈 이루려 사범학교 마치고 다시 대학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교회를 더 열심히 다녔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조창석 목사님이 선화감리교회(현 하늘문교회)에 시무하셨다. 나는 주일학교에서 성탄절을 맞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맞춰 무용을 하고 연극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다. 주님은 내게 더 없는 요람이요 평강의 품이었다. 하나님 때문에 나는 어머니를 잃고도 학업에 정진하며 모범생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대전사범학교 전기 시험을 보았다. 사실 떨어지기를 바랐으나 수석으로 합격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사범학교를 다니게 됐다. 그곳에서 시의 첫 스승인 한성기 선생님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사범학교에서 3년간의 교육은 나의 ..
[역경의 열매] 김소엽 (2) 인민군, 예수쟁이 낙인 찍어 ‘숙청대상 1호’ 지목 어머니는 키도 크시고 피부가 유난히 희고 아름다운 분이셨다. 딸 넷이 다 예뻤지만 어머니의 미모에는 미치지 못한다고들 했다. 또한 어머니는 인정 많기로 소문난 분이셨다. 춘궁기가 되면 광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쌀과 보리를 나눠주어 사람들이 자루를 들고 줄을 서서 퍼주는 곡식을 받아들고 연신 절을 하며 돌아가곤 했다. 또 한 달에 두어 번 쌀 한 가마가 들어갈 만큼 큰 시루에 떡을 만들어 동네에 돌리곤 했다. 언니와 나는 떡을 돌리는 일을 좋아했다. 어른들은 떡을 받아들고 고마운 마음을 빈 접시에 담아 보내면서 “예쁘기도 하지”라고 칭찬을 해줬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인정 덕분에 우리 마을은 복음이 잘 전해졌고 그 덕에 우리는 6·25전쟁 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동아일보를 창간호부터 구독..
[역경의 열매] 김소엽 (1) 아들 잃은 어머니, 하나님 만난 뒤 눈물이 감사로 전도서의 기록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극동방송에서 ‘하나되게 하소서’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을 무렵 국민일보로부터 ‘역경의 열매’를 집필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나와 함께 일하던 기독여성 문인들이 역경의 열매를 썼으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나이 쉰도 안 된 마흔 중반에 간증을 한다는 것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뿐이라 일흔이 넘으면 쓰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대로 일흔이 넘어 이제 말할 때가 된 것이라 생각하고 조심스런 마음으로 이 글을 집필하게 됐다. 나는 세상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교회와 함께했고 하나님과 함께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태신앙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태어날 무렵은 일제 말기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이 심했던 때였다. 내가 살고 있던 충남 논산 양촌면 석서리 산골에는 30여..
[역경의 열매] 홍덕선 <10·끝> “백지에 성경을 쓸 때마다 말씀의 무게 실감” 홍덕선 장로(왼쪽)가 2007년 1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주최로 열린 ‘2007 한국교회의 밤’에서 한기총 문화예술선교대상 예술선교부문을 수상한 뒤 가족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환갑을 넘기고 나서도 서예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다는 다짐에는 변함이 없었다. 2007년 발족한 한국기독교서예협회는 지금까지 내 사역의 보루가 되고 있는 단체다. 이 단체는 한국미술인선교회에서 독립한 기구로 기독 서예가 60여명이 가입돼 있다. 한국미술인선교회에서 서예 부문을 따로 독립해 별도의 단체를 만든 건 서예를 통한 선교를 좀 더 치열하게 전개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단체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회장을 맡아 협회를 이끌고 있다. 설립 첫 해부터 매년 협회전을 개최했고, 2009년부터는 기독 서예가 발굴을 위해..
[역경의 열매] 홍덕선 <9> 기독교 문화 전파 위해 ‘예술 선교’ 단체 이끌어 홍덕선 장로(앞줄 왼쪽 네 번째)가 1995년 ‘제8회 기독교문화대상’을 수상한 뒤 촬영한 기념사진. 1992년 9월 한국예술인연합선교회가 발족하면서 나의 사역도 새롭게 시작됐다. 특히 단체 산하에 있는 한국미술인선교회는 크리스천 서예가로서 본격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든 활동의 새로운 거점이었다. 나는 한국미술인선교회 초대 회장에 선임됐다. 부회장에는 당시 이화여대 미대 학장이던 최병상 교수가 임명됐고 내로라하는 크리스천 작가들이 단체에 가입했다. 우리는 발족 이듬해인 93년 12월 서울 이화여대 미술관에서 ‘제1회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을 개최했다. 동양화 서양화 서예 조각 등 각 부문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상대로 공모를 진행해 약 80명에게 상을 수여했다. 이 시상식은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맥을 이어오..
[역경의 열매] 홍덕선 <8> “성경 말씀만 쓰겠다”… 본격 기독서예가의 길로 홍덕선 장로(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1984년 5월 ‘제3회 춘파 홍덕선 서예 개인전’을 열고 지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78년부터 14년간 한국기독교미술인선교협회에 몸담으면서 벌인 갖가지 활동은 정말 보람찬 일이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를 세상을 위해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원이 150명이 넘었는데, 나는 단체에 이름만 걸쳐놓는 수준이 아니었다. 협회가 하는 일이라면 항상 발 벗고 나섰다. 특히 85년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었던 전시회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다. 85년은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지 100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다채로운 기념사업을 벌이던 해였다. 협회에서도 이를 기념해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 국제미술전’을 개최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신 축복에 감사하며 ..
[역경의 열매] 홍덕선 <7> 예술 통해 하나님의 사랑 알리기 14년간 사역 홍덕선 장로가 1980년 4월 서울 인사동 예총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건물 입구에 그의 전시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나는 1978년 서예학원을 차렸다. 학원 이름은 내 호(號)를 딴 ‘춘파서예학원’.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앞 한 상가건물 2층에 위치한 학원이었다. 66.1㎡(약 20평) 남짓한 아담한 학원이었지만 개원하자마자 수강생이 몰렸다. 학원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매달 적을 때는 50∼60명, 많을 때는 100명 넘는 수강생이 등록했다. 매일 저녁이면 학원은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퇴근한 뒤 학원을 찾는 직장인이 많았다. 낮에는 한국도로공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수강생을 가르치고, 밤에는 서예가로서 내 작품 활동에 매진하는 날이 이어졌다. 젊었으니..
[역경의 열매] 홍덕선 <6> 국전 첫 입상 이후 번번이 고배… 오자 시비까지 홍덕선 장로(왼쪽)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1975년 9월 촬영한 가족사진. 한국도로공사에서 일하던 시절, 내 서예 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사내에 퍼지면서 점심시간을 활용해 직원들을 상대로 붓글씨를 가르치게 됐다. 회사에서 가장 낮은 직급의 직원이었지만 서예 시간만큼은 달랐다. 사장도, 이사도 수업이 시작되면 나의 제자였다. 1970년대는 정부가 국민들을 상대로 각종 동호회 활동을 장려하던 시기였다. 이런 배경 덕분에 꽃꽂이 바둑 등과 함께 서예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컴퓨터나 타자기가 많이 활용되지 않던 시기여서 당시 사람들은 글씨를 잘 쓰는 걸 엄청난 자산으로 여겼다. 원곡(原谷) 김기승(1909∼2000) 선생과의 인연도 계속됐다. 일주일에 한 차례 선생의 집을 방문해 서예를 배웠다. 당시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