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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정영관

[역경의 열매] 정영관 <5> “자는 데 방해된다” 새벽종 막은 호랑이 이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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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 봉일천교회 건물 앞에 선 정영관 원로목사 부부의 모습.
신성교회를 떠나 다음 부임지로 간 곳은 경기도 파주의 봉일천교회였다. 이삿짐을 내려놓고 쉬고 있는데 밤 10시가 넘어서 한 여성 교인이 집에 찾아왔다. 손에는 고기가 들려있었다. “목사님, 예배시간에 대표기도 시키지 말아주세요. 그거 부탁드리려고 왔어요.” 고기는 청탁용이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재밌기도 했다.

넉 달쯤 뒤 그 교인이 수요 저녁예배의 대표기도를 할 차례가 됐다. 나는 주보 대표기도 담당자에 그분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곤 그분을 만나 이야기했다. 왜 공중기도를 해야 하는지,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초등학교 교사이고 믿음도 신실했던 그분은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수요일 저녁. 그분은 말도 없이 교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교인들은 “앞으로 그 교인은 교회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까운 교인을 잃었다”며 뒤에서 날 나무라는 교인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다음 주 주보에도 수요 저녁예배 대표기도 담당자에 그 여성 교인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곤 찾아가서 다시 설득했다.

“언제까지 예수 믿으실 겁니까.” “평생 믿어야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평생 공중기도를 안하실 생각입니까.” “시간이 지나면 하게 되겠지요.” “아뇨. 기도를 배우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는 훈련입니다.”

간단하게 기도문을 적어드렸다. 그분은 내가 써준 기도문을 외워서 대표기도를 했다. 기도가 끝나자 다른 교인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평생 처음으로 대표기도를 한 이 교인은 이후 집사를 거쳐 권사가 돼 속장, 여선교회 회장으로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그리고 우리교회 첫 여성 장로가 돼 지방 여선교회 회장까지 역임했다.

나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초종(初鍾)을 치고 교회에 들어가 호롱불을 키고 빗자루로 예배당 바닥을 쓸었다. 방석을 깔고 기도를 하다가 4시30분이 되면 재종(再鍾)을 친 뒤 새벽기도회를 인도했다. 고등학생 때 교회에 간다고 아버지에게 회초리가 부러질 정도로 종아리를 맞았던 나는 새벽기도를 통해 믿음을 키웠고, 신학대에까지 갈 수 있었다. 나에게 새벽기도회는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우리 동네엔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동네를 좌지우지하던 ‘호랑이 이장’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느 날 교회를 찾아와 무서운 눈을 부릅뜨고 새벽종을 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날부터 난 새벽기도를 하며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리고 매일 이장을 찾아갔다.

이장은 마을에서 외톨이였다. 그를 매일 찾아가며 대화하고 가까워지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 찾아가 이런저런 안부를 물었다. 그러다보니 호랑이 이장님도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는 못했다. 30대 초반인 나와 환갑이 넘은 노인은 좋은 친구가 됐다. “동네 사람들 자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며 새벽종을 치지 말라던 이장은 그 후 새벽종소리가 나면 “젊은 놈들아, 빨리빨리 일어나라”고 했다.

시간이 흘러 봉일천교회에서 중앙감리교회로 옮겨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일천교회가 있던 마을에서 사람이 왔다. “이장님이 병환이 위독해 돌아가실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목사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서울에서 달려가 상봉한 뒤 사흘 만에 이장님은 세상을 떠났다.

정리=이용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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