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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정영관

[역경의 열매] 정영관 <1> “목사가 되고 싶어요” 고교 때 2년간 새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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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차림의 정영관 중앙감리교회 원로목사가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중앙감리교회 예배당에서 왼손에 성경책을 든 채 활짝 웃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여든 일생을 돌이켜보면 나도 참 바보처럼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를 여섯 번 옮겨가며 목회를 하면서 더 큰 교회로 가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끼니를 챙기기 어려운 형편에도 교회에 사례비를 올려달라고 요청하지도 못했다. 45년간의 목회를 마치고 2006년 은퇴를 할 때도 어떤 예우를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요즘 시대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나와 아내는 정말 바보천치였다.

그러나 나는 목사가 된 것을 평생 동안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 사실 내 의지로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 이 역시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으로 나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런 나의 사명에 대해 지금도 감사드린다.

그래서 은퇴 후에도 중국으로 훌쩍 떠나 큰 아들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8년간 조선족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쳤는지 모른다. 이들이 목회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중국에 웨슬리신학대학원을 설립한 것도 하나님의 사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다.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를 통해 그동안 걸었던 종의 길을 다시 한 번 돌아보니 단 한순간도 하나님의 시선이 나를 빗겨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때 나의 꿈은 철학자였다. 철학자가 되고 싶어서 철학개론과 서양철학사 등을 사서 읽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문학가가 되고 싶었다. 문학개론, 시문학 입문을 사서 읽었다. 시도 써보고 소설도 써봤다. 그러다 고1을 마치고 봄방학 때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다. 당시 나보다 한 살 어린 15살의 전신마비 장애인이 부흥강사로 나섰다. 얼굴은 보기 흉하게 찌그러져 있었고 입도 비틀어져 침이 줄줄 흘렀다. 그런 그가 눈앞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을 때 내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들린 주님의 음성. ‘너의 건강한 몸을 복음을 전하는데 바치지 않겠느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이튿날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2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나갔다. 기도를 잘 하지 못했던 나는 새벽에 교회에 가서 눈을 감고 이 말만 반복했다. “하나님, 목사가 되고 싶어요. 복음을 전하는 데 제 한몸을 바치고 싶습니다. 목사가 되게 해주세요.”

충남 청양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야소교(당시엔 기독교를 이렇게 불렀다)를 믿으면 집안이 망한다”며 내가 교회에 다니는 걸 반대했다.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주일이면 일을 시켰다. 나는 일을 하다가도 예배시간이 되면 일을 멈추고 교회로 달려갔다. 돌아오면 아버지는 늘 회초리 5개를 손에 쥐고 계셨다. 회초리가 부러질 때까지 매를 맞았지만 그럴수록 나의 믿음과 소명감은 더 강해졌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 원서를 준비하는데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신학교에 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새벽기도를 빠짐없이 다니는 동안 성품이 변화하는 것을 보시며 신학 공부를 허락하신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밤새도록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감사기도를 드렸다. 당시 경험으로 나는 이후 목회를 하며 가장 큰 비중을 ‘새벽기도’에 두게 됐다.

정리=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약력=△감리교신학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석사 △미국 풀러신학대 목회학 박사 △전 건국대 교목실장 △전 학교법인 관악학원 이사장 △기감 아랍선교회 창립 △중앙감리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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