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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정영관

[역경의 열매] 정영관 <4> 교사 봉급 죄다 털어 천막 지붕 예배당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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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관 원로목사가 교회 청년들과 직접 지은 신성교회. 건물 앞에 아이를 안고 있는 이가 정 목사의 아내다.
감리사에게 추천받은 교회는 충남 아산에 있었다. 주일 아침 일찍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 간 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찾았지만 교회는 보이지 않았다. 물어 물어 겨우 찾아간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한 농가였다. 사립문에 ‘신성교회’라는 작은 간판을 걸어놓고 주일마다 목회자도 없이 청년 둘이 대청마루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 교회는 1953년 9월에 기도처로 시작했는데 10년이 흐르는 동안 전담교역자를 구할 형편이 못돼 더 이상 교회를 유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건물도 없고 교인도 둘뿐이라 당연히 한 푼의 사례비도 없었다. “교감으로 있는 학교에서 월급을 받으니 내 생활비는 걱정하지 말라”며 교인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이 교회에서 다시 목회를 시작했다. 주일 아침마다 시외버스를 타고 신성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뒤 오후엔 동네 주민들을 찾아 다녔다. 저녁예배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밤이 깊었다. 수요일에도 학교를 일찍 마치고 교회에 가서 저녁예배를 인도했다. 청년 둘을 놓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말씀을 전했다. 이렇게 6개월을 하니 교회에 발길을 끊었던 동네 주민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교인도 늘었고 동네 어르신들과도 가까워졌다. 교감이 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고 ‘울며 겨자 먹기’로 떠안은 자리였지만 동네 주민들은 전도사보다 교감이라는 것 때문에 나를 인정해줬다. 이것이 마을 주민들에게 복음을 심는데도 큰 도움이 됐다. 하나님은 그렇게 나의 목회를 이끌고 계셨다.

청년 둘로 시작했지만 교인은 금세 10여명으로 늘었다. 대청마루가 비좁아지면서 방문을 열고 건넌방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방까지 예배당으로 써야했고 급기야 강대상을 마루 아래 추녀 밑에 두고 말씀을 전했다. 이듬해 봄, 나와 아내는 아예 교회 근처로 이사를 했다.

교인 수가 늘면서 예배당이 필요했다. 돈이 문제였다. 땅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인근 밭 300여평을 교인 한 가정과 함께 매입할 수 있게 해 주시고 그 중 100평을 쌀 세 가마니에 교회부지로 쓸 수 있게 하셨다. 교회 건축은 교회 청년들과 힘을 합쳐 직접 했다.

당시 내가 교감으로 있던 삼화중학교도 교실이 부족해 공사를 했는데 건축기사들이 쓰던 흙벽돌 제조기를 빌려서 4개월 동안 교회 청년들과 함께 벽돌 1500개를 만들었다. 기술자 2명을 고용해 직접 땅을 파서 기초를 만들고 벽돌을 건축현장까지 옮겨 벽돌을 쌓고 대들보와 서까래를 올렸다. 막상 지붕을 올리려고 보니 돈이 없어서 천막으로 덮었다. 이렇게 예배당을 짓는데 학교에서 받는 봉급을 죄다 사용했다. 감리사와 몇몇 목회자를 초청해 입당예배를 드리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10년 간 목회자도 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던 교회에 사람과 건물을 세워놓은 뒤 이듬해 나는 목사 안수를 받고 다른 교회로 파송됐다.

교회를 짓느라 생긴 빚을 갚기 위해 우리 부부는 소중한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아내는 두 돈짜리 백금 결혼가락지를 팔았고 나는 한 돈짜리 백금 반지를 팔았다. 결혼식 때 양복 대신 샀던 오디오까지 팔았더니 말 그대로 빈털터리가 됐다. 우린 결혼을 한 뒤 첫 번째 목회지이자 사랑과 정성과 재산을 쏟아 부었던 교회를 떠나야 했고 교인들은 첫 번째 담임 목회자를 보내야 했다. 교회를 나서면서 우리 부부와 교인들은 부둥켜안고 울었다.

정리=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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