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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정영관

[역경의 열매] 정영관 <3> “생활비 못대 교역자 없는 곳 파송해 달라” 자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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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 금가면 유송교회의 모습. 교회 앞에 서 있는 이가 유송교회를 세운 교사 최옥란씨.
충북 충주 금가면 유송교회로 가는 길엔 작은 강이 가로막고 있었다. 교회에 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이 강을 건너야 했다. 이렇게 찾아간 교회는 작은 흙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만 얹은 채 창문도 없는 초라한 건물이었다. 유송교회는 마을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여교사가 세웠다. 이 여교사는 주일에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앞산 소나무 아래에서 함께 찬송을 부르고 성경공부를 했는데 아이들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장로였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땅을 빌리고 동네 청년들과 함께 흙벽돌을 쌓아 교회를 세웠다. 교인들은 10명도 채 안됐다. 나이가 제일 많은 한 집사님이 식사를 제공해주셨고 내가 머무를 사랑방 하나를 내어 주셨다. 사례비는 한 푼도 없었다. 그런데 이 동네에선 돈 쓸 일이 없어서 사례비가 없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책꽂이와 책상. 내 방에 있는 가구는 그게 전부였다. 나는 꽤 많은 책을 갖고 있었다. 신학대에 다닐 때는 책을 사기 위해 점심을 굶었다.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3년간 그랬다. 학기 초에 기숙사에 점심을 안 먹겠다고 말하면 기숙사비의 일부를 환불해줬는데 그 돈으로 책을 샀다. 을지로2가 뒷골목에 있는 혈액은행에서 헌혈을 한 뒤 받은 돈으로 책을 사기도 했다. 지금도 갖고 있는 책 중에는 표지에 ‘피 값으로 산 책’이라고 써놓은 게 있다. 이런 책들을 방에 잔뜩 비치해두니 동네 청년들이 내 방을 도서관같이 이용했다. 나는 교회 청년들과 함께 봄엔 모내기를 하고 여름엔 김매고 가을엔 벼를 베고 겨울엔 교회를 수리했다. 밤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동네 아이들을 위해 공부를 가르쳤다. 이것도 목회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다른 중학교 교감으로 가게 됐다. 내가 원했던 건 아니다.

충남 온양에 있는 삼화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한 목사님이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교사 자격증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하니 삼화중 교감으로 오라고 했다. 이 목사님은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만 학교에서 근무했다. 학교를 챙길 교감이 필요하던 차에 나를 눈 여겨 봤던 것이다. 목회를 하기 위해 교사를 그만둔 적이 있던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했다.

그런데 이듬해 1월 내가 삼화중 교감으로 결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제가 분명히 안 가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자네를 기다리며 6개월 동안 교감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뒀네. 졸업식, 학생 모집, 입학식 등 주요 행사가 수두룩한데 교감이 없으면 안 된다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삼화중 교감 겸 교목으로 발령이 났고 온양온천 변두리에 있는 작은 단칸방으로 이사를 갔다. 이렇게 두 번째 목회지를 떠나야했다.

아내와 결혼한 것도 이때쯤이다. 가진 게 없어서 겨우 결혼반지 하나를 마련해 결혼식을 올리고 셋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결혼식 때도 무릎이 찢어진 양복을 짜깁기해 입고 나갔다. 주님의 뒤를 따르는 종의 길을 걷는다는 생각 때문에 가난하게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게 전혀 부끄럽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학교생활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의 길은 교육자가 아니라 목회자였다. 나는 아산 지역의 감리사(기감의 교역자를 지도하는 목회자)를 찾아가 “생활비를 지불하지 못해 교역자를 모시지 못하는 교회가 있다면 저를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학교에서 받는 생활비가 있으니 교회에선 생활비를 받지 않아도 괜찮았다. 마침 그런 교회가 하나 있었다.

정리=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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