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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정영관

[역경의 열매] 정영관 <7·끝> 카페서 시작해 청년 위한 ‘꿈이 있는 교회’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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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월 완공된 중앙감리교회 모습.
중앙감리교회에서 목회하며 하나로빌딩의 지하공간을 교육관으로 사용했다. 지하실에 ‘제이씨하우스(J-C House)’라는 카페 형식의 청년교회를 만들어 교회학교 및 청년들을 위한 열린 예배를 시작했다. 교회 안에 또 다른 교회를 만든 것이다. 교회 청년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친구들을 초청해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하면 우리 교회 부목사면서 이 청년교회를 담당한 하정완 목사가 다가가 신앙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때가 1997년으로 서울 시내 최초의 청년카페였다. 학창시절 아버지에게 매를 맞으며 교회를 다녔던 나는 청소년과 청년 사역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송정미 최인혁 최덕신 좋은씨앗 등 유명 CCM가수들과 신인가수들을 초청해 공연도 했다. CCM 공연장이 없던 시절 제이씨하우스는 CCM 가수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해가 거듭되면서 청년들의 수가 점점 늘어 하나로 빌딩 지하에서 모임을 갖기가 어려워졌다. 우리교회에서 5000만원을 지원해 종로구 북촌마을에 새로운 예배처를 구했다. 35명의 청년들과 함께 젊은이교회인 ‘꿈이 있는 교회’를 시작했다.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경기도 파주에 하나로중앙교회를 개척했다. 우리 교회에서 10년 넘게 부목사로 헌신했던 최헌 목사를 담임목사로 파송했다. 1998년 8월30일 기공예배를 드린 뒤 건축공사를 시작해 1999년 2월에 눈물의 봉헌예배를 드렸다. 마치 정성을 다해 기른 자식을 결혼시켜 새살림을 내주는 것 같은 감격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교회의 교육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교회 110주년 기념사업으로 분규 중이던 관악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를 인수해 서울관광고등학교로 특성화한 뒤 명문 기독교학교로 발전시켰다.

목회라는 직업은 그 성격상 보수를 위한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보수에 대한 정해진 기준이 없다. 그래서 교회와 목사 간의 아가페적 사랑만이 유일한 기준이다.

나는 감리교회 목사로 45년, 그 중 38년을 중앙교회 목사로 오직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회한 뒤 은퇴했다. 교회를 건축하기 전에는 교회를 건축해야 하니까, 교회를 건축한 다음은 빚을 갚아야 하니까, 빚을 갚은 후에는 선교와 교육과 사회봉사의 사명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워도 생활비를 올려달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은퇴를 앞둔 우리 부부는 노후에 대한 준비가 전혀 돼있지 않았다. 살 집도 없었고 노후 생활 대책도 없었다. 세 아들은 모두 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나와 아내가 은퇴 후 함께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은퇴를 1년 반 앞두고 양로원 등 노인요양시설을 찾아다녔지만 교회나 교인에게 은퇴 후 예우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중앙감리교회는 내가 살던 38평형 목사관과 목회를 위해 타고 다니던 승용차, 목회 공로금 1억원, 매월 생활비를 지원해주기로 결정했다. 중앙감리교회의 아가페적인 목사 사랑이었다.

나는 이임예배에서 “하나님께서 지난 38년간 나에게 사랑하는 중앙감리교회를 맡기셨던 것처럼 후임 정의선 목사에게 이 교회를 맡기셨으니 온 교회가 후임 목사님을 도와 교회를 부흥시켜 달라”고 당부한 뒤 큰 아들이 목회하고 있는 중국으로 떠났다. 이는 중앙교회에 대한 나의 아가페적인 사랑이었다. 나와 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관계로 남아있게 하시고 멋지게 원로목사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정리=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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