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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정영관

[역경의 열매] 정영관 <2> 교사 발령 포기하고 월급 적은 부목사로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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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 신학과를 다니던 1950년대 중반의 정영관 원로목사.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바로 내가 갈 수 있는 교회는 없었다. 다행히 충남 지역에서 고등학교 교사 채용고시에 합격해 충남 서천고등학교 영어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신학교 3학년 때부터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야간에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쳤기 때문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당시 급여는 월 6600원이었다. ‘지금은 내가 목회할 교회가 없으니 3년만 교사를 하고 목회를 하자’는 생각으로 서천고 교장 선생님을 만나 부임 날짜까지 확정했다. 그런데 3일 후 논산제일교회에서 나를 찾아오더니 당장 다음 주부터 부목사로 오라는 것이었다. 생활비는 월 2000원에 쌀 두 말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무엇보다도 그 어려운 교사 채용고시에 합격해 부임 날짜까지 정해졌는데 갑자기 “못 가게 됐다”고 통보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큰아버지가 충남 지역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고, 아버지가 중학교 교사를 했다. 형과 매형도 현직 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레 교사를 못하겠다고 하면 가족들까지 욕을 먹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시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좋은 대우를 받는 곳을 선택해야 했다. 교사는 월급이 6600원이지만 목사는 2000원이란 점도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었다. 당시 결혼을 약속했던 지금의 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함께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구했다. 그리곤 교회에 부목사로 가기로 결정했다. 목회할 교회가 없어서 교사를 하다 3년 후 교회로 돌아갈 작정이었는데 당장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바로 목회를 시작하는 게 맞겠다는 판단에서다. 형편은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나의 목회는 이렇게 시작됐다.

목회를 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내가 부임했을 때 교회는 교인들이 둘로 나뉘어 있었다. ‘반대파’ 교인들은 나에게 “당신은 우리교회 부목사가 아니야”라고 소리쳤다. 설교와 심방, 주일학교 인도, 새벽기도 등 교회 사역에 전념했지만 일부 교인들은 여전히 부목사로 인정하지 않았다.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로 화해하자’는 생각에 기도실 강단 앞에 커다란 십자가를 만들어놓고 기도했지만, 반대파 교인들은 십자가를 내다 버렸다. 1년여 지나 교회를 사임하고 충주의 유송교회로 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수십년이 지나 나타났다. 우연히 한 목사님을 만났는데 자신이 당시 논산제일교회의 교인이었다고 했다. 그 목사님은 내가 교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면서도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싸우지 않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며 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종으로 부르시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는 생각을 했다. 인정받지 못하는 목사를 보며 ‘저런 게 목사라면 안 하겠다’고 생각할 법도 한데 오히려 그런 꼴을 보고 목사를 하기로 결심했다는 게 놀라웠다.

20여년 전에는 논산제일교회에 초청받아 부흥회를 인도하며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고, 이 교회 100주년 기념행사 때는 십자가 선물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못 받았던 교인들의 사랑과 내팽개쳐졌던 십자가를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되돌려 받은 셈이다.

이 일을 회상하면 나는 이 말씀이 떠오른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정리=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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