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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홍덕선 <7> 예술 통해 하나님의 사랑 알리기 14년간 사역 홍덕선 장로가 1980년 4월 서울 인사동 예총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건물 입구에 그의 전시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나는 1978년 서예학원을 차렸다. 학원 이름은 내 호(號)를 딴 ‘춘파서예학원’.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앞 한 상가건물 2층에 위치한 학원이었다. 66.1㎡(약 20평) 남짓한 아담한 학원이었지만 개원하자마자 수강생이 몰렸다. 학원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매달 적을 때는 50∼60명, 많을 때는 100명 넘는 수강생이 등록했다. 매일 저녁이면 학원은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퇴근한 뒤 학원을 찾는 직장인이 많았다. 낮에는 한국도로공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수강생을 가르치고, 밤에는 서예가로서 내 작품 활동에 매진하는 날이 이어졌다. 젊었으니..
[역경의 열매] 홍덕선 <6> 국전 첫 입상 이후 번번이 고배… 오자 시비까지 홍덕선 장로(왼쪽)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1975년 9월 촬영한 가족사진. 한국도로공사에서 일하던 시절, 내 서예 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사내에 퍼지면서 점심시간을 활용해 직원들을 상대로 붓글씨를 가르치게 됐다. 회사에서 가장 낮은 직급의 직원이었지만 서예 시간만큼은 달랐다. 사장도, 이사도 수업이 시작되면 나의 제자였다. 1970년대는 정부가 국민들을 상대로 각종 동호회 활동을 장려하던 시기였다. 이런 배경 덕분에 꽃꽂이 바둑 등과 함께 서예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컴퓨터나 타자기가 많이 활용되지 않던 시기여서 당시 사람들은 글씨를 잘 쓰는 걸 엄청난 자산으로 여겼다. 원곡(原谷) 김기승(1909∼2000) 선생과의 인연도 계속됐다. 일주일에 한 차례 선생의 집을 방문해 서예를 배웠다. 당시 선생..
[역경의 열매] 홍덕선 <5> 내 주변 사람들 잇따라 예수 영접하는 ‘은혜’ 홍덕선 장로(왼쪽)와 아내 안순복 권사가 1971년 4월 19일 결혼식에서 하객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다 . 내가 지금도 신기하게 생각하는 건 나를 시작으로 차례로 내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점이다. 여동생이 아프면서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친척들 대부분이 하나둘씩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 됐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를 만난 시기는 군에서 제대한 1970년 6월이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서울 신길동에서 자취를 했는데, 아는 누님이 중매를 서겠다고 나섰다. 같은 동네에 있는 아내의 집을 찾아가 소개를 주고받았는데,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아내는 젊은 시절 정말 예뻤다. 처음 본 ..
[역경의 열매] 홍덕선 <4> ‘훈련소 유급’ 고난 뒤 선망하던 부대에 배치돼 홍덕선 장로가 육군본부에 복무하던 시절 서예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 스무 살쯤 됐을 때다. 나는 내 호(號)를 직접 지었다. 봄 춘(春)에 언덕 파(坡)를 합친 ‘춘파’. 온갖 꽃이 만발하는 봄의 언덕처럼 생기가 넘치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될 리는 만무하다. 누구나 그렇듯이 내 삶에도 크고 작은 고난이 끊이지 않았다. 1967년 7월, 나는 군에 입대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역경이 찾아왔다. 사격훈련에서 낙제점을 받는 바람에 그만 유급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고동락한 동기들은 자대에 배치되는데 나 혼자 덩그러니 훈련소에 남아 다음 기수 훈련병과 또다시 훈련을 받아야 했다. 당시 느낀 자괴감은 엄청났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 자신이 너무 한..
[역경의 열매] 홍덕선 <3> ‘취업 알선’ 믿었다가 송아지 판 목돈 사기 당해 홍덕선 장로(가운데)가 1980년 4월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스승인 원곡 김기승(오른쪽)과 함께 촬영한 사진. 1965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나의 진로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당시 서울에는 6촌 형님이 살고 계셨는데 “서울에서 먹고 살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내 특기는 글씨를 잘 쓰는 거였으니 펜글씨를 배워보기로 마음 먹었다. 신문을 보고 찾아간 펜글씨 학원은 서울 을지로3가에 위치한 ‘중앙펜글씨학원’이었다. 한 달쯤 다녔을까. 어느 날 학원 강사가 나를 불렀다. “너는 글씨를 잘 써서 가르칠 게 없다.” 결국 그해 4월 나는 충남 예산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런데 얼마 뒤 학원 원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사로 학생들에게 펜글씨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이었다. ..
[역경의 열매] 홍덕선 <2> 교회친구들이 불렀던 ‘홍 장로’ 별명이 실제로 홍덕선 장로가 충남 예산농고 2학년에 재학할 때 찍은 증명사진. 홍 장로는 고교 시절에도 붓글씨로 유명한 학생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마을에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문맹(文盲)이 많았다. 주민 대다수는 농민이었다. 아버지도 농사꾼이었다. 다른 집과 다른 게 있다면 우리 집안이 양반 가문이어서 마을 주민들의 신망을 받았다는 점이다. 동네 사람들은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갔다. 주민들은 자식들이 전장에서 편지를 보내오면 편지를 들고 우리 집으로 달려와 아버지께 대신 읽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이들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어 답장을 보내는 것도 아버지의 몫이었다. 이처럼 시시콜콜하게 유년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이런 환경에서 자란 게 ..
[역경의 열매] 이상직 <1>“총선에서 실패 맛보게 하신 건 하나님의 뜻” 이스타항공 창업주인 이상직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3월 전북 전주의 국민연금공단 노조를 방문해 발언하고 있다. 올해 총선을 코앞에 두고 당내 경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흔히 말하는 실패를 맛봤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나를 더욱 단단하게 하시려는 뜻이리라 생각한다. 국민일보로부터 역경의 열매 제의를 받고 지난 시간들을 돌아봤다. 많은 추억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4·13 총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대 국회가 개원한 지 3개월이 되어간다. 나에 대한 호칭도 ‘국회의원’에서 ‘전 국회의원’으로 바뀌었다. 돌이켜보면 초선 국회의원으로서 혈기왕성하게 19대 국회에 입성했다. 평소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고 느꼈던 철학대로 ‘민생(乙)을 위한 정치’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정무위원회 활동을 하..
[역경의 열매] 김정란 <1> 17세에 단돈 100원 들고 고향 떠나 사회 첫 발 수입 명품 도자기숍을 운영하는 김정란 대표가 23일 경기도 성남의 푸른언덕 매장에서 도자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한여름의 강한 햇빛도 사라지고 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에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다음 달이면 이곳 청계산 입구의 ‘푸른언덕’ 주변은 온통 단풍으로 물들 것이다. 벌써부터 온 산을 붉게 수놓을 아름다운 풍경에 가슴 설렌다. 푸른언덕은 해외 명품 도자기 판매와 카페를 겸한 사업장이다. 내가 가꾼 두 번째 일터다. 상호는 같지만 30년 넘게 해왔던 출판유통 분야 사업이 아닌, 전혀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 푸른언덕 1층은 유럽풍 카페로, 2층은 세계 명품 도자기 전시 판매장으로 꾸몄다. 서울 인근에서 자연과 더불어 유럽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도록 아름다운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