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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홍덕선

[역경의 열매] 홍덕선 <4> ‘훈련소 유급’ 고난 뒤 선망하던 부대에 배치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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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선 장로가 육군본부에 복무하던 시절 서예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
스무 살쯤 됐을 때다. 나는 내 호(號)를 직접 지었다. 봄 춘(春)에 언덕 파(坡)를 합친 ‘춘파’. 온갖 꽃이 만발하는 봄의 언덕처럼 생기가 넘치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될 리는 만무하다. 누구나 그렇듯이 내 삶에도 크고 작은 고난이 끊이지 않았다.

1967년 7월, 나는 군에 입대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역경이 찾아왔다. 사격훈련에서 낙제점을 받는 바람에 그만 유급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고동락한 동기들은 자대에 배치되는데 나 혼자 덩그러니 훈련소에 남아 다음 기수 훈련병과 또다시 훈련을 받아야 했다.

당시 느낀 자괴감은 엄청났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혹독한 훈련 과정을 다시 밟는 것도 힘들었다. 내 이름 앞에는 이른바 ‘고문관’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렇게 훈련 과정을 다시 밟은 뒤에야 자대 배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배치된 곳은 서울 삼각지에 있던 육군본부. 당시만 해도 육군본부는 많은 훈련병이 선망하던 부대였다. 이른바 힘 있는 집안 출신이어야 갈 수 있는 곳이 육군본부였다. 하나님이 고난 뒤에 선물을 준비해놓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거듭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육군본부에 가서도 좋은 일은 계속 일어났다. 자대 배치 첫날 내 신상명세서를 보던 상관의 시선은 한곳에서 멈췄다. 입대 전 내가 펜글씨 강사로 일했다는 내용이었다.

군대에서도 글씨 잘 쓰는 사람은 대접받던 시대였다. 나는 본부에서도 많은 장병들이 선호하던 인사행정과에 배치됐다. 일병으로 진급한 뒤에는 인사행정과에서 같이 일한 상관이 육군 참모총장 비서실로 발령이 나면서 나 역시 비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군대에서도 내 붓글씨는 유명했다. 상관들이 붓글씨를 써 달라고 부탁하면 종이와 붓으로 글씨를 써서 전달하곤 했다.

하지만 군 시절 내내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군에 입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홉 살 아래 여동생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다. 갑자기 몸이 마비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다고 했다. 상태가 호전돼 걸을 수 있게 된 건 2∼3년 뒤였다. 하지만 이후 동생은 정신분열증을 앓기 시작했다.

80년의 어느 봄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동생은 충북 옥천의 한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충북 청주의 한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동생이 병원에 실려 왔는데 위급하다는 것이다. 병원에 도착하니 동생은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큰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했다.

결국 앰뷸런스를 타고 충남 아산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앰뷸런스 안에서 여동생을 내려다보며 찬송가를 부르고 동생이 깨어나길 기도했다. 하지만 동생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직도 동생이 어떻게 요양원을 빠져나와 병원까지 실려 왔는지 알지 못한다.

부모님이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건 70년대 초반이었다. 여동생의 병이 낫지 않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나가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30여년 전 세상을 떠났다.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먼저 세상을 뜬 딸의 얼굴이 어른거렸을 것이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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