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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홍덕선

[역경의 열매] 홍덕선 <3> ‘취업 알선’ 믿었다가 송아지 판 목돈 사기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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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선 장로(가운데)가 1980년 4월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스승인 원곡 김기승(오른쪽)과 함께 촬영한 사진.
 
 
1965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나의 진로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당시 서울에는 6촌 형님이 살고 계셨는데 “서울에서 먹고 살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내 특기는 글씨를 잘 쓰는 거였으니 펜글씨를 배워보기로 마음 먹었다.

신문을 보고 찾아간 펜글씨 학원은 서울 을지로3가에 위치한 ‘중앙펜글씨학원’이었다. 한 달쯤 다녔을까. 어느 날 학원 강사가 나를 불렀다. “너는 글씨를 잘 써서 가르칠 게 없다.”

결국 그해 4월 나는 충남 예산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런데 얼마 뒤 학원 원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사로 학생들에게 펜글씨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이었다. 다시 상경했고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펜글씨만 잘 쓰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던 시대였다. 학원 수강생 중에는 내로라하는 기업 임원도 많았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사기를 당한 것도 그때였다. 어느 날 학원에서 만난 한 남성이 식사를 하자고 불러 나를 꼬드겼다. 정확한 액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돈을 주면 한국전력 취업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아버지는 내게 송아지를 판 목돈을 건넸다. 한국전력 취업을 약속받았으니 학원 강사도 그만뒀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내가 약속을 지키라고 윽박 지르니 의약 관련 신문사에 취직시켜주는 것으로 갈음하겠다고 했다. 신문사에 입사했지만 내게 주어진 일은 신문 배달이었다.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랐기에 크게 낙심했다.

사회 초년생으로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셈이다. 결국 나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광화문에 있는 한 펜글씨학원에 취업해 다시 학생들을 상대로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쳤다.

서울에 상경해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교회에는 꼬박꼬박 나갔다. 성경 말씀을 외우며 묵상하는 일도 많아졌다.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한 구절은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이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펜글씨를 가르치며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서예가가 되겠다는 꿈을 잊은 적은 없다. 꿈을 현실로 바꾸기 위한 첫 걸음은 원곡(原谷) 김기승(1909∼2000) 선생을 만나뵙는 일이었다. 이듬해 4월 서울 적선동에 있는 선생의 자택을 찾아갔다. 엄청나게 큰 기와집이었다.

당시 나는 내 글씨 솜씨가 최고라고 자부하던 청년이었다. 원곡 선생 앞에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붓글씨를 썼다. 하지만 원곡 선생은 내가 쓴 글씨를 보더니 대번에 그 종이를 던져버렸다. 마음에 안 든다는 의미였다. 자만에 가득차 있던 나는 선생의 반응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선생은 나를 제자로 받아줬다. 그때를 생각하면 선생 자택을 방문하던 내로라하는 명사들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재규(1926∼1980), 한국도로공사 사장 등을 역임한 윤필용(1927∼2010) 등이 선생의 서실(書室)을 방문해 글씨를 배우곤 했다.

나는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퇴근 이후 일주일에 한두 차례 선생 자택을 방문해 글씨 쓰는 법을 배웠다. 서예가로서 내 인생이 시작된 시기였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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