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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홍덕선

[역경의 열매] 홍덕선 <6> 국전 첫 입상 이후 번번이 고배… 오자 시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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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선 장로(왼쪽)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1975년 9월 촬영한 가족사진.

 

한국도로공사에서 일하던 시절, 내 서예 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사내에 퍼지면서 점심시간을 활용해 직원들을 상대로 붓글씨를 가르치게 됐다. 회사에서 가장 낮은 직급의 직원이었지만 서예 시간만큼은 달랐다. 사장도, 이사도 수업이 시작되면 나의 제자였다.

1970년대는 정부가 국민들을 상대로 각종 동호회 활동을 장려하던 시기였다. 이런 배경 덕분에 꽃꽂이 바둑 등과 함께 서예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컴퓨터나 타자기가 많이 활용되지 않던 시기여서 당시 사람들은 글씨를 잘 쓰는 걸 엄청난 자산으로 여겼다.

원곡(原谷) 김기승(1909∼2000) 선생과의 인연도 계속됐다. 일주일에 한 차례 선생의 집을 방문해 서예를 배웠다. 당시 선생의 명성은 엄청났다. 선생의 글씨체를 일컫는 ‘원곡체’는 강한 힘이 느껴지는 서체였다. 원곡체로 쓴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뭉클한 감동을 느낄 때가 많았다.

당시까지 누구의 이름을 딴 서체는 추사(秋史) 김정희(1786∼1865)의 추사체밖에 없었다. 원곡체가 생겼다는 건 그만큼 선생의 업적이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74년의 어느 날로 기억한다. 선생이 자신을 따라 한 대기업 서예 수업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선생이 서예 강사로 서던 기업이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선생은 회사 직원들 앞에서 “앞으로는 나 대신에 여기 서 있는 홍덕선씨가 여러분을 가르칠 것”이라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선생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서예가로서 입지를 굳히려면 국전에서 입상해야 했다. 나는 국전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했고, 75년에 처음으로 국전에서 입상했다. 하지만 이듬해 열린 국전에서는 낙방의 쓴맛을 맛보았다. 나를 포함해 원곡 선생의 제자 15명이 각각 작품을 출품했는데 떨어진 사람은 나 혼자였다.

이듬해 열린 국전에서도 떨어졌다. 번번이 탈락의 아픔을 맛보자 자괴감이 들었다. ‘내 한계는 여기까지인가’라는 생각을 수없이 곱씹었다. 이 시기 국전의 위상은 엄청났다. 국전에 입상하면 가문의 영광으로 받아들여졌다. 각종 신문에는 입상자 명단이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내 삶에서 가장 서예에 매진한 시기도 이때였다. 퇴근한 뒤에는 서실에 앉아 붓을 잡고 밤을 지새웠다. 서예에 너무 매달리다가 과로로 코피를 쏟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5시간 넘게 서서 글씨만 쓰다가 쓰러진 적도 있다. 아내는 서예에만 몰두하는 남편을 둔 탓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서예라는 건 독특한 세계다. 아무리 연습해도 실력이 금세 늘지 않는다. 거북이의 걸음처럼 느리게 전진하는 게 붓글씨 실력이다. 글씨를 쓰면서 엄청난 벽 앞에 서 있는 기분을 맛볼 때가 많았다.

국전에 다시 입상한 해는 78년이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때도 문제가 생겼다. 입상한 내 작품에 오자(誤字)가 있다는 시비가 일었고, 국내 유력 일간지에 큼지막하게 기사가 실렸다. 서예가로서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 불거진 셈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한학자들을 찾아가 자문을 받았다. 다행히 오자가 아니라는 판정을 이끌어냈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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