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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홍덕선

[역경의 열매] 홍덕선 <7> 예술 통해 하나님의 사랑 알리기 14년간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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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선 장로가 1980년 4월 서울 인사동 예총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건물 입구에 그의 전시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나는 1978년 서예학원을 차렸다. 학원 이름은 내 호(號)를 딴 ‘춘파서예학원’.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앞 한 상가건물 2층에 위치한 학원이었다.

66.1㎡(약 20평) 남짓한 아담한 학원이었지만 개원하자마자 수강생이 몰렸다. 학원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매달 적을 때는 50∼60명, 많을 때는 100명 넘는 수강생이 등록했다. 매일 저녁이면 학원은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퇴근한 뒤 학원을 찾는 직장인이 많았다.

낮에는 한국도로공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수강생을 가르치고, 밤에는 서예가로서 내 작품 활동에 매진하는 날이 이어졌다. 젊었으니까, 에너지가 넘쳤으니까 그렇게 살 수 있었다.

80년 4월 15일, 서울 인사동 예총화랑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50점 정도를 내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았다. 뛸 듯이 기쁘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실감한 것도 이때였다. 서예가로서 비로소 첫 발을 내디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장에는 수많은 화환과 화분이 답지했다. 너무 많은 화환, 화분이 들어와 개인전을 끝내고 트럭으로 이것들을 싣고 와 동네 사람들에게 싼값에 팔았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은 저마다 인생의 전성기가 있다고 하는데, 내 삶의 클라이맥스는 첫 개인전을 열었던 80년의 봄날이었던 것 같다.

개인전을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10년간 다닌 회사를 그만뒀다. 서예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집사람에게 이 결심을 전하니 아내는 엉엉 울었다.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정기적으로 받는 월급이 생계의 기반이었던 탓에 앞날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를 설득하는 건 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예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거듭 전하니 결국에는 남편의 생각을 존중해줬다.

사표를 제출하니 사장도 나를 불러 왜 그만두는지 물었다. “서예가로서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다”고 답하자 사장은 “그런 이유라면 말리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일주일에 한 차례 회사를 방문해 직원들을 상대로 계속 서예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10년간 다닌 회사를 그만뒀다.

80년대는 서예에 모든 걸 바친 시기였다. 학원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남는 시간은 붓글씨를 쓰는 데 매진했다. 나의 글씨가 궤도에 올랐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항상 겸손한 자세로 붓을 잡았다. 더디지만 연습한 만큼 계속 성장하는 것을 느꼈기에 서예 훈련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학원도 번창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도 수차례 입선했다. 개인전도 꾸준히 열었다. 70년대가 서예가로서 입지를 다진 시절이었다면 80년대는 차곡차곡 명성을 쌓아간 시기였다.

서예 작업 외에 그나마 내가 한 일이 있다면 회사를 그만두기 전인 78년부터 몸담은 한국기독교미술인선교협회를 통해 벌인 다양한 활동이다. 나는 이 단체에서 92년까지 14년간 일했다.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았다. 특히 총무를 맡아 단체 살림을 도맡다시피 하며 활동한 기간이 길었다. 예술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사역은 정말 값진 일이었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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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618768&code=23111513&cp=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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