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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주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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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보안소 수감 중 소장 아내 치료… 큰 위기 벗어나 [역경의 열매] 주선애 (8) 보안소 수감 중 소장 아내 치료… 큰 위기 벗어나 월남하다 하룻밤 만에 돌아와 자수… 산파 면허 있는 내게 아내 치료 부탁 입력 : 2019-06-19 00:00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뒷줄 가운데)가 1950년 장로회신학교 재학 때 동기들과 남산에서 산기도 후 기념사진을 찍었다. 해가 저물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떨리는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마음속에선 소리 없는 외침이 그치지 않았다. ‘주여, 주여. 이 가엾은 종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칠흑 같은 밤이 됐고 산속에 불빛이라곤 없었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나무에 찔리고 가지에 걸려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됐다. 이렇게 혼자서 방향도 모른 채 서울로 갈 수는 없었다. 결국, 도망 하룻밤 만에..
(7) 폭압정치와 기독교 박해 심해진 평양 떠나 서울로 [역경의 열매] 주선애 (7) 폭압정치와 기독교 박해 심해진 평양 떠나 서울로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린 평양, 박해 심하고 기독교인들 저항 거세 입력 : 2019-06-18 00:05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의 은인들 사진이다. 1945년쯤 촬영했다. 왼쪽부터 친구 명선성, 은사 임종호 선생님, 친구 이필숙. 1946년 7월 북한 땅에는 변화의 폭풍이 불어 닥쳤다. 소련에서 나온 김일성이 집권한 뒤 폭압정치가 시작됐다. 자유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독립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애국자들을 모두 잡아가는 등 공산주의 세력 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정치인들뿐 아니라 지주와 기업가, 특히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노골적으로 이뤄졌다.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기독교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김..
(6) 산파 면허증 받고 주님과 약속한 무료봉사 실천 [역경의 열매] 주선애 (6) 산파 면허증 받고 주님과 약속한 무료봉사 실천 무의촌 의료봉사하기 위해 교사생활 틈틈이 산파공부… 매일 새벽기도로 봉사 다짐 입력 : 2019-06-17 00:00/수정 : 2019-06-17 00:12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앞줄 가운데)가 1951년 무렵 경북 영덕군 영해교회 교인들과 교회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산파(産婆)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니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마침 남편 최기호 목사가 중국 봉천(현 선양)에 집회를 인도하러 가게 됐다. 당시 중국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책이 많다는 얘길 들었던 터였다. “책을 좀 사다 주실 수 있겠어요? 산파 공부를 하고 싶은데 자격시험 준비를 위한 교재가 필요해요.” 남편은 내게 일본어로 된 책 6..
(5) 평소 어머니가 점찍어둔 주일학교 선생님과 결혼 [역경의 열매] 주선애 (5) 평소 어머니가 점찍어둔 주일학교 선생님과 결혼 젊은 과부로 힘겹게 사셨던 어머니… 사위라도 빨리 맞으려 서둘러 정해 입력 : 2019-06-14 00:01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지향하게 해 준 가가와 도요히코의 ‘사선을 넘어서’ 책 표지.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는 유치원 보모가 됐다. 요즘 말로 유치원 교사였다. 백부님은 당시 동평양교회의 회계를 담당하면서 동평양유치원을 경영하셨는데 백부님의 추천으로 보모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깜냥이 안 되는 사회 초년생에게 보모 역할이 쉬울 리 없었다.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아이들을 돌보고 동화책 하나 읽어주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포털사이트에서 영상이 노출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민일보 미..
(4) 안창호 선생의 돌더미 보며 독립 위해 헌신 다짐 [역경의 열매] 주선애 (4) 안창호 선생의 돌더미 보며 독립 위해 헌신 다짐 “독립 위해 산책 나올 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 세워 놓으셔” 마음에 민족애 생겨 입력 : 2019-06-13 00:00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왼쪽)가 정의여학교에 다닐 때 모습이다. 현모양처(賢母良妻). 불과 20여년 전만해도 상당수의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에 적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1910~20년대 조선땅의 일본인들은 사회의식이 강한 여성이 독립운동을 펼쳐 식민지 조선을 잃을 것에 대비해 계략을 펼쳤다. 여성교육의 목표를 현모양처로 정하고 사회 활동을 하는 여성은 ‘오덴바(말괄량이를 뜻하는 일본 말)’라고 가르쳤다. 당시 여자아이들은 말괄량이가 아닌, 조용하고 정숙한 여성이 되고자 했다. 그런 까닭으로 김활란 ..
(3) “남성 못지 않은 실력과 인격 갖추자” 강조 [역경의 열매] 주선애 (3) “남성 못지 않은 실력과 인격 갖추자” 강조 여성들 교육하면서 남존여비 때문에 남성들 공격하는 식 여권운동 늘 반대 입력 : 2019-06-12 00:05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가 1936년을 전후해 정진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할 때의 모습. 날 향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극진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과일과 견과류 등 내가 좋아하는 간식이 베개 옆에 놓여있었다. 할아버지가 준비해두신 특별 간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을 다섯이나 낳아 키웠지만 모두 20대 안팎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어쩌다 나와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사는 손녀딸 2명만 혈육으로 남았다. 할아버지는 겨울이 되면 내게 두루마기를 입히고 모자를 씌운 뒤 남대문 거리에 나가시곤 했다. 발길이 많은 곳을 부러 ..
(2) “이 아이 사랑받으며 살게 해주세요”… 할머니의 기도 [역경의 열매] 주선애 (2) “이 아이 사랑받으며 살게 해주세요”… 할머니의 기도 다섯 아들 잃은 아픔 많은 할머니 기도와 말씀으로 위로 받아… 외롭게 자란 날 불쌍히 여겨 입력 : 2019-06-11 00:05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오른쪽)가 1975년 어머니의 고희(70세)를 맞아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어머니는 집에서 10리 넘게 떨어진 교회에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갔다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다. 교회는 찬양하고 예배하는 곳에 그치지 않았다. 한글반을 열어 학교라고는 구경도 못한 어린 소녀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한글을 가르쳐줬다. 글자를 공부하며 써볼 종이가 필요했지만, 당시 형편상 살림을 맡은 오빠에게 연필과 종이를 사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대신 오빠가 쓰다 버리려 했던 몽당연필과..
(1) 선친의 유지 받들어 평생 ‘기독교 선생’의 삶 [역경의 열매] 주선애 (1) 선친의 유지 받들어 평생 ‘기독교 선생’의 삶 “딸이지만 꼭 기독교 선생 되길…” 아버지가 남긴 한 마디 유언 어머니는 일생을 통해 이뤄나가 입력 : 2019-06-10 00:01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4일 서울 강동구 자택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을 소개하고 있다. 내 삶에 기독교교육을 향한 길을 낸 건 스물셋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이 세상은 잠깐이라오. 내가 죽더라도 선애를 잘 키워 주오. 선애는 딸이지만 꼭 기독교 선생이 되도록 길러 주오.” 장맛비가 퍼붓던 1926년 7월 21세의 앳된 여인이 평양에서 황해도 장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역에 내려서도 40리 길을 쉼 없이 걸어 구미포란 곳을 향했다. 폐결핵으로 요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