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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주선애

(1) 선친의 유지 받들어 평생 ‘기독교 선생’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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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주선애 (1) 선친의 유지 받들어 평생 ‘기독교 선생’의 삶

“딸이지만 꼭 기독교 선생 되길…” 아버지가 남긴 한 마디 유언 어머니는 일생을 통해 이뤄나가

입력 : 2019-06-10 00:01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4일 서울 강동구 자택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을 소개하고 있다.

내 삶에 기독교교육을 향한 길을 낸 건 스물셋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이 세상은 잠깐이라오. 내가 죽더라도 선애를 잘 키워 주오. 선애는 딸이지만 꼭 기독교 선생이 되도록 길러 주오.”

장맛비가 퍼붓던 1926년 7월 21세의 앳된 여인이 평양에서 황해도 장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역에 내려서도 40리 길을 쉼 없이 걸어 구미포란 곳을 향했다. 폐결핵으로 요양 중인 남편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떠나온 여인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가지 않으면 마지막 숨을 혼자 거둘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눈물이 흘러 빗길을 걷는 발걸음을 더 힘들게 했고 18개월 된 딸은 우산 안으로 들이치는 빗물을 피하지 못한 채 엄마 등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 여인이 내 어머니요 어린 딸이 나였다.


아버지는 한 농가의 작은 사랑채에 창백한 얼굴로 혼자 누워있었다. “잘 왔다”는 한마디 말을 남긴 채 한참 말이 없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울음이 서서히 멎을 무렵 호흡을 가다듬으며 겨우겨우 마지막 말을 맺으셨다. 그렇게 남긴 유언을 가슴에 품은 채 어머니는 70여년간 홀로 사셨다. 남겨진 재산도, 혼자 살아갈 만한 경험도 없이 어린 딸과 둘이 세상에 내던져진 삶이었다.

어머니 변정숙 여사는 어떻게 해야 딸을 기독교 선생으로 키울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의논해 볼 곳도 가르쳐줄 만한 사람도 주변엔 없었다. 아버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남긴 한 마디 유언을 어머니는 일생을 통해 이뤄나가셨다.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에겐 경황이 없어 남편의 유언에 “예”라고 답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린 게 일평생 한이 됐다. 그리고 ‘내 기어코 당신의 뜻을 몸으로 이루리라’고 수없이 되뇌며 살아오셨다. 그 후로 76년이 지나 97세가 되기까지 어머니의 삶은 충분히 “예”라는 대답으로 점철됐다.

증조할아버지는 순회 전도 여행을 하던 사무엘 모펫(한국명 마포삼열)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 증조할아버지의 전도로 할아버지 3형제의 가족이 모두 기독교인이 됐다. 우리 할아버지 주인섭은 3형제 중의 맏아들로서 아들만 5형제를 낳아 키우셨다.

그러나 아들 다섯이 20대를 전후해 하나하나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폐결핵은 치료약이 없어 그저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있으며 요양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래서 아들 5형제를 모두 먼저 천국으로 보내셨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셨던 나의 아버지 주기남은 넷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고향인 평남 대동군에 있는 추빈리교회에서 일찍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하셨다. 주일학교 교사를 아주 열심히 했던 청년이었으며 주변에 있던 꽃을 꺾어 아동 설교를 하는 등 특출난 방법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아버지에 관한 사진이나 기록은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귀한 유언은 어머니의 일평생을 지배했다. 놀랍게도 그 유언은 예언처럼 이뤄졌다. 내가 신학교에서 일생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기도와 유언이 나를 일관된 축복의 길로 인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 약력=1924년 평양 출생, 장로회신학교, 영남대 졸업. 숭실대 교수, 장로회신학대 교수, 대구 신망고아원 원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 탈북자종합회관 관장 역임. ‘어린이 성장의 이해’ ‘장로교 여성사’ 등 저술.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1989) 목련장(1994) 김마리아상(2010) 수상.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영상=장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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