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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주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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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태극기 달아 놓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항의 [역경의 열매] 주선애 (17) 태극기 달아 놓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항의 전쟁 후 고통받는 우리나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미국과 비교돼… “한국은 영적으로 축복” 응답받아 입력 : 2019-07-02 00:05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가 1956년 미국 뉴욕성서신학교 기숙사 책상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여학생 기숙사에 있는 자매들은 친절했다. 무엇이든 도와주려 했다.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 다시 정리하고 숙제를 날마다 제출했는데 타자도 서툴고 영어도 누군가가 교정을 봐줘야 했다. 미국 학생들보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외출은 주일에 교회 가는 것 외에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시간이 아까워 양치하면서도 공부할 것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기도시간이 사라졌다. ‘이건 아닌데. 내가 주를 섬기기 위해 공..
(16) 2주만에 도착한 미국… 영어 울렁증에 손짓으로만 [역경의 열매] 주선애 (16) 2주만에 도착한 미국… 영어 울렁증에 손짓으로만 조국에 유익한 사람 되지 못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을 각오 다지며 기도 입력 : 2019-07-01 00:08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왼쪽 첫 번째)가 1956년 9월 미국 뉴욕성서신학교 캠퍼스에서 베티 파킨슨 부인(가운데)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드디어 배가 부산항을 떠났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무거운 선체가 움직이는데 그제야 ‘정말 고국을 떠나는구나’하는 두려움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당시 내게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게 지구 끝에서 반대편 끝으로 가는 듯했다. 미국까지는 14일이 걸린다고 했다. 난간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고 떠납니다. 이제 저 까마득하게 보이는 내 조국에 ..
(15) 드디어 6년간 준비한 미국 유학길 올라 [역경의 열매] 주선애 (15) 드디어 6년간 준비한 미국 유학길 올라 성경학교 이상근 목사님 도움으로 3번의 시험과 신분 조사 무사히 통과… 전액 장학금과 여비·잡비 지원 입력 : 2019-06-28 00:01/수정 : 2019-07-02 10:50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뒷줄 가운데)가 1956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직전 대구역에서 동료 및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망원에서의 시간도 어느덧 2년여가 흘렀다. 대구 고등성경학교(현 영남신학대) 여자기숙사 사감으로 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박형룡 박사님과의 약속도 있었기에 신망원 사역은 늘 함께 기도하던 친구 한순애 권사에게 맡기고 이상근 목사님이 교장으로 계시는 성경학교로 출발했다. (포털사이트에서 영상이 노출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민일보 ..
(14) “깔치 왔네” 비웃던 아이들… 나중엔 울며 회개 [역경의 열매] 주선애 (14) “깔치 왔네” 비웃던 아이들… 나중엔 울며 회개 유학 준비 중 잠시 고아원 맡게 돼… 사랑받지 못해 비행 일삼는 원생들 십자가 사랑 깨닫게 해달라 기도 입력 : 2019-06-27 00:01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오른쪽)가 1960년쯤 신망원 출신인 김태연씨(가운데)의 장신대 졸업식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었다. 장로회신학교 박형룡 학장님 말씀을 따라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학장님은 신학교에서 종교교육을 가르치길 원했던 날 장로교 선교부에 직접 데리고 가 소개하면서 여학생이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선교부에서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셨다. 선교부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학장님의 적극적인 추천에 마음이 무겁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영어공부를..
(12) 남한 첫 예배서 우렁찬 찬송 소리에 가슴 벅차 [역경의 열매] 주선애 (12) 남한 첫 예배서 우렁찬 찬송 소리에 가슴 벅차 북에서 몰래 드리던 예배 떠올라 눈물…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에 삶과 인격 오롯이 표현돼 감동 받아 입력 : 2019-06-25 00:01/수정 : 2019-06-25 00:27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1949년쯤 사진을 촬영했다. 누구나 생애 가장 특별한 축복이라 여길만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내게는 한경직 목사님 곁에서 정신적 영적으로 삶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던 게 잊히지 않는 축복의 순간이다. 지금도 목사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내 영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1948년 남한에 와서 처음 예배를 드린 곳이 영락교회였다. 지금의 봉사관 자리에 있던 베다니전도교회(현 영락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마..
(11) 고달파도 슬프지는 않았던 남산 해방촌 기숙사 [역경의 열매] 주선애 (11) 고달파도 슬프지는 않았던 남산 해방촌 기숙사 추위와 배고픔 이길 수 있었던 건 모든 게 주의 길 가는 이들이 겪는 잠시 동안의 고생일 뿐이라 생각 입력 : 2019-06-24 00:07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1950년쯤 장로회신학교 여학생, 교수님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남산 해방촌엔 유달리 북한 사람이 많이 살았다. 이북에서 피난 온 대학생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송죽원’이란 학사가 생겨 그곳에서 생활하게 됐다. 건물은 꽤 컸지만, 난방이 안 됐고 전기도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한겨울에도 미군들이 쓰던 매트리스 한 개에 두 사람이 같이 누워 잤다. 너무 추워 견디기 힘들 때 조금 따뜻하게 자는 방법이 있었다. 두 사람이 등을..
(10) 기도하다 천국 가길 원했던 남편… 영원히 가슴에 담아 [역경의 열매] 주선애 (10) 기도하다 천국 가길 원했던 남편… 영원히 가슴에 담아 회복되지 않은 간질병 증세에도 새로운 사역지 생겨 기뻐했던 남편… 새벽기도 후 쓰러져 주님 품으로 입력 : 2019-06-21 00:01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뒷줄 오른쪽 세 번째)와 신학생들이 1953년쯤 박형룡 박사와 학교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9월 학기가 시작되면서 남산의 장로회신학교 편입 등록을 마쳤다. 어찌어찌 굶지 않고 세 식구가 먹고살았지만, 생활고가 해결되진 않았다. 전차표를 살 돈이 없어 마포에서 남산까지 꼬박 걸어 다니며 강의를 들어야 했다. 형편상 교과서나 참고서를 마련하기도 힘들었다. 북한에서 공부하던 것보다 고될 수밖에 없었다. 강의를 듣는다곤 하지만 교실은 일본 신사 자리의 가장 넓은 방..
(9) “이제 넘어왔습니다” 안내자 말에 “만세” “할렐루야” [역경의 열매] 주선애 (9) “이제 넘어왔습니다” 안내자 말에 “만세” “할렐루야” 풀려난 뒤 남쪽으로 향해 걷던 중 같은 처지의 안내자 일행과 합류… 추위와 배고픔 속에 필사의 탈출 입력 : 2019-06-20 00:00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가 월남한 후 만난 백부와 백모님이 1955년쯤 회갑연을 갖는 모습. 보안소에서 풀려난 뒤 남쪽을 향해 무조건 걸었다. 한참을 걷다 20여명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순간 멈칫했지만 행색을 보니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인 듯했다. 얘길 나눠보니 한 명의 안내자와 함께 남쪽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얼마나 고달픈 길을 가는지 알기에 자연스레 나를 그 무리에 들어가게 해 줬다. 안내자를 필두로 긴장감 속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정이 이어졌다. 안내자가 20m쯤 앞장서 가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