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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주선애

(12) 남한 첫 예배서 우렁찬 찬송 소리에 가슴 벅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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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주선애 (12) 남한 첫 예배서 우렁찬 찬송 소리에 가슴 벅차

북에서 몰래 드리던 예배 떠올라 눈물…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에 삶과 인격 오롯이 표현돼 감동 받아

입력 : 2019-06-25 00:01/수정 : 2019-06-25 00:27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1949년쯤 사진을 촬영했다.

누구나 생애 가장 특별한 축복이라 여길만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내게는 한경직 목사님 곁에서 정신적 영적으로 삶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던 게 잊히지 않는 축복의 순간이다. 지금도 목사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내 영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1948년 남한에 와서 처음 예배를 드린 곳이 영락교회였다. 지금의 봉사관 자리에 있던 베다니전도교회(현 영락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마당까지 가득 차서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교회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귀에 꽂히는 우렁찬 찬송소리에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쏟아졌다.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런 찬송을 듣는 게 몇 해 만인가 싶었다. 북한에서 몰래 드리던 예배가 떠올랐다. 한 목사님의 모습은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성도에게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도 황송하고 행복했다.


내가 잠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서울에 돌아와 영락교회 유년부 지도를 맡았을 때 한 목사님은 이따금 유년부를 찾아와 축도를 해주셨다. 목사님은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데 탁월한 목회자였다. 기도 한 번을 하시더라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언어로 해주셨다.

한 목사님은 매 주일 아침 일찍 주일학교를 시작하기 전에 본당과 교회 마당에 놓여 있는 돌계단 중간에 서 계셨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결같이 그곳에 서 계시며 영아부부터 중고등부, 대학부에 이르기까지 출입하는 모든 학생과 교사, 성도들과 인사를 주고받으셨다. 멀리서 지나가는 성도가 목사님께 다가서지 못해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손짓만 전해도 빠짐없이 목례로 반겨 주셨다.

한 목사님의 인격에서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에 나는 탄복했다. 순수하고 복음적인 설교에 그분의 삶과 인격이 오롯이 표현됐기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 새해가 되면 장로회신학교 이광순 교수와 함께 남한산성에 있는 목사님 자택을 방문해 세배를 드리곤 했다. 거실이 넓지 않아 세배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지만 나름대로 오붓하게 말씀도 나눌 수 있었고 한 해를 의미 있게 시작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우리 일행이 댁을 나설 때면 늘 문밖까지 따라 나오셔서 눈길 조심하라고 당부하시곤 했다. 그의 겸손함에 언제나 내 머리가 절로 숙어졌다. 한 목사님을 어떻게 하면 좀 더 닮을 수 있을까 싶을 뿐이다. 지금도 영락교회에 가면 한 목사님의 향취를 느끼곤 한다.

1950년 5월 학교를 졸업하면서 박형룡 박사님의 권면에 따라 진학의 길을 찾아봤다. 때마침 연세대에 신학과가 생겨 성서신학대학원 과정을 공부해 볼 요량으로 신청하기로 했다. 장로회신학교 추천서가 필요해 신청했는데 며칠 후 박 박사님의 사모님한테서 나를 보자는 연락이 왔다. 영문을 모르고 찾아간 자리에서 뜻밖의 얘길 들었다.

“주 선생, 어찌 학교를 배신할 수 있어요. 복음주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떻게 자유주의 신학을 가려고 하십니까.”

나의 무지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외국에서나 하는 것인 줄 알았다. 나는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울면서 사모님께 사과를 드렸다. 기도 끝에 진학 대신 목회의 길을 내보기로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며 제일 먼저 부르는 곳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여기겠다고 결심했다. 며칠 후 부산에 있는 김형식 전도사님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그 만남은 곧 부전교회로 향하는 사역의 길이 됐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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