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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홍덕선

[역경의 열매] 홍덕선 <1> “붓글씨로 말씀 전하는 달란트 주심에 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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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서예가 홍덕선 장로가 최근 서울 양천구 자택에 있는 서실(書室)에서 자신의 인생 역정을 소개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지난 6월 30일이었다. 내가 창립 때부터 이끌고 있는 한국기독교서예협회는 설립 10년째를 기념해 서울 종로구 백악미술관에서 ‘한국기독교서예협회전’을 개최했다. 협회 회원 34명이 출품한 작품을 내건 전시회였다. 한국미술인선교회에서 독립해 2007년 4월 발족한 한국기독교서예협회는 서예로 말씀을 전하는 기독 서예가들의 공동체로 신진 발굴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이날 전시회를 앞두고 예배를 드리면서 감정이 복받쳤다. 백악미술관이 있는 서울 인사동은 온갖 미신에 기대 만들어진 우상(偶像) 조각품이 난립하는 장소다. 그런 곳에서 주님을 찬양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새긴 작품을 내걸었다는 게, 그런 단체를 10년째 이끌었다는 게 나를 감격시켰다. 회원들은 목청껏 주님을 찬양했고, 뜨거운 목소리로 기도를 드렸다.

나는 한평생 붓에 의지해 살아온 서예가다. 거친 인생의 풍파를 이겨내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주님의 사랑 덕분이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는 말씀처럼 내가 내디딘 발걸음마다 주님이 함께했다. 주님은 나보다 한걸음 앞에서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셨다.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코너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은 뒤 백지를 꺼내 검정색 볼펜으로 내 삶을 써내려갔다. 이 코너로 굴곡진 인생 역정을 전한 분들에 비하면 내 삶은 평탄했던 편이다. 재미나 감동이 덜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용기를 내 내 삶을 전하기로 한 건 말씀을 종이에 새기는 서예가로 살아온 독특한 이력이 많은 이에게 흥미롭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내 고향은 충남 아산 인주면에 있는 금석리라는 마을이다. 금석리는 그 시절 농촌이 대부분 그러하듯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두메산골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자동차를 구경했고, 초등학교 1학년 때 소풍을 갔다가 기차를 처음 봤다.

우리집은 이른바 ‘양반 집안’이었다. 사랑채에서는 항상 누군가 글 읽는 소리가 들렸고, 집안 곳곳에 지필묵(紙筆墨)이 있어 어린시절부터 글을 읽고 쓰는 데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삼강오륜을 삶의 철칙으로 여기는 분이었다. 명절 때면 동네 인근에 있는 조상님 묘소를 찾아가야했는데 힘이 들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기쁨에 아버지를 따라 기꺼이 성묘에 동참했던 기억이 난다.

6·25를 겪긴 했지만 워낙 어린시절이어서 기억에 남는 일은 별로 없다. 행여나 폭격을 당할까 염려해 어르신들이 한밤중에 등잔불도 못 켜게 단속했던 일, 만약에 있을 공습에 대비해 집 뒤뜰에 방공호를 파던 어른들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훗날 주님의 종으로 거듭났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교회에 나간 적 없는 사람이었다. 유교에 기반을 둔 가풍(家風) 아래에서 자란 탓에 교회에 나가는 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내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건 집에서 40리(약 16㎞) 거리에 있는 온양중학교에 진학하면서였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약력=△1946년 충남 아산 출생 △동아미술제 1·3회 입선, 국전 24·27회 입선, 대한민국미술대전 1·3·4·5회 입선 △한기총선교예술대상, 기독교문화대상, 한국기독교미술상 서예부문 수상 △한국미술인선교회 초대회장, 한국예술인연합선교회 회장,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현 한국기독교서예협회 회장, 서울 목동중앙교회 원로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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