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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열매]김의식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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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교회, 치유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 김의식 목사 간증 (6) 김의식 목사가 1983년 수도경비사령부에서 군종 사병 생활을 하던 모습. 김 목사는 군 생활이 영성은 물론 체력과 정신력을 연단하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1981년 7월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그 후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청와대 경호부대)으로 배치를 받았다. 내가 30경비단에 가게 된 데는 잊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야간 신학교를 졸업한 후 혜성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금요철야 기도회를 인도할 때였다. 칠순이 넘고 몸도 불편하신 김순례 권사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실 때마다 “우리 전도사님, 서울 시내 한복판에 배치돼 우리 교회에 계속 나오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서울 시내 한복판이라고 하면 광화문 네거리인데 이순신 장군 동상 옆에 서..
치유하는 교회, 치유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 김의식 목사 간증 (5) 김의식(왼쪽) 목사와 문채성 사모가 1981년 광주제일교회에서 결혼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 목사와 문 사모는 가난한 신혼생활 중에도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성서침례신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포스터 선교사님께서는 군대를 마치고 미국에서 석·박사학위 과정을 전액 장학생으로 다니도록 해줄 테니 유학 준비를 하라고 권면하셨다. 장로교회 출신이었던 나로서는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남노회장까지 역임하셨던 아버지는 “어떻게 부자간에 장로교와 침례교로 나뉠 수 있겠냐. 네가 그렇게 좋다 하는 복음을 장로교회에 와서 전하면 되지 않느냐”고 눈물로 권면하셨다. 그래서 나는 장신대 신대원 한경직 목사님 특별장학생 선발시험에 응시했다. 그때 장신대 교무과에 매형의 매형이 되시는 권길웅 장로님이 교무과장으로..
치유하는 교회, 치유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 김의식 목사 간증 (4) 김의식(화살표) 목사가 1978년 서울 성서침례신학교(현 성서침례대학원대) 입학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목사는 한양대 재학 시절 성령을 통한 병 고침을 받고 야간에 신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숭일중학교와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77년 한양대 공대에 입학했다. 슈바이처 선교사의 삶에 감명을 받아 재수하며 의대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됐다. 춤을 배우고 술을 마셨다. 그해 11월 종강 파티를 마치던 날 밤 서울 마포구 집으로 돌아와 쓰러졌다. 처음에는 몸살감기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2주 동안 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어도 고열과 오한이 그치지 않았다. 한 달이 넘게 신촌의 작은아버지 병원이며 고향의 전남대병원을 찾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다시 서울 병원으로 가..
치유하는 교회, 치유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 김의식 목사 간증 (3) 김의식(뒷줄 오른쪽 두 번째) 목사의 아버지가 1998년 전남 나주 영산포중앙교회에서 원로장로로 추대될 당시 찍은 가족사진. 내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로움 속에 살고 있을 때 나를 붙잡아 주신 분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고 방구석에서 혼자 울고 있을 때마다 다가와 “의식아, 엄마가 네가 미워서 그랬겠냐? 다 너 잘되라고 하신 거야!”하면서 위로해 주셨다. 아버지의 사랑은 당시 나를 붙들어 주는 가장 큰 힘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아버지에게 큰 실망을 안겨 드리는 일이 터졌다. 아버지가 약방에서 손님을 대하고 계실 때 그 뒤편 금고에서 돈을 훔치려고 한 적이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신 아버지가 돌아보시는 바람에 그만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
치유하는 교회, 치유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 김의식 목사 간증 (2) 부모님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셨다. 내 위로 누나와 형, 그리고 아래로 두 여동생이 있다. 모두 부모님의 신앙을 이어받아 교회를 섬기며 각각 의사 약사 한의사 간호사 그리고 목사 가정을 이뤄 복되게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셋째인 나에게 있었다. 부모님은 약방이나 교회 일로 늘 바쁘셔서 여러 자녀에게 깊은 사랑을 쏟아 주기 힘들었다. 더욱이 나는 남매 중 한가운데에 샌드위치가 되어 위로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아래로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 상처는 처음엔 부모님에 대한 불순종과 형제들과의 다툼으로 터져 나왔다. 어머니는 나에게 “저것은 형이나 누나는 안 닮고 동생들만도 못하니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어쩌다가 저런 것을 낳았는지 모르겠어야!”하고 한탄을 쏟아놓으셨다. 그때마다 내 상처는..
치유하는 교회, 치유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 김의식 목사 간증 (1) 내 고향은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동 262번지다. 1958년 4월 20일 나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까지 영산포초등학교를 다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호남 출신이어서 받은 혜택보다는 상처가 훨씬 크고 많았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대학을 갈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서 경험한 지역 차별은 생각보다 심했다. 졸업 후 장신대 신대원에 들어갈 때도 그랬고 이후 목회를 시작할 때도 그랬다. 신학대학원 시절에도 호남 출신 전도사들은 서울 시내 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자리를 얻기가 힘들었다. 지금도 호남 출신 목사가 서울 지역 교회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한다. 혹독한 지역 차별의 상처와 고통의 연단 속에서 나는 호남의식을 더욱 강하게 가졌고, 차별받는 불쌍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