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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열매]김의식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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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교회, 치유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 김의식 목사 간증 (14) 화곡동교회는 10여년에 걸친 분쟁을 그치고 부흥을 거듭한 끝에 2012년 새 예배당을 짓고 입당했다. 이름도 현재의 치유하는교회로 바꿨다. 글로리아채플에서 성도들이 예배하는 모습. 화곡동교회의 분쟁은 갈수록 더욱 심해지며 끝이 보이질 않았다. 교회뿐만 아니라 노회 수습전권위원회와 관계도 점점 악화했다. 수습전권위원회 부위원장 목사님이 수습을 전제로 각서를 쓰라고 해서 쓰면, 위원장 목사님이 반대하셨는지 그 후에는 각서 내용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하셨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은 끝이 없었다. 그중에 가장 눈물 나는 일은 수습전권위원회가 불러서 갔다가 위원장 목사님이 노회를 탈퇴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면서 3시간 반 동안 온갖 욕설을 쏟아놓았던 일이다. 노회 탈퇴는 우리 교회의 마지막 투쟁 카드였기에 각서를 ..
치유하는 교회, 치유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 김의식 목사 간증 (13) 김의식(앞줄 왼쪽 다섯 번째) 목사가 2000년 서울 화곡동교회 목사 위임예배에서 당회원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00년 6월 11일 서울 화곡동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부임하기 전부터 한 안수집사님이 화곡동교회에 오면 다치니까 오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10여 차례씩 보내왔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의식(義植)이라는 이름 그대로 누가 불의하게 압력을 가하면 더욱 드세게 일어서는 의식(意識)이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시끄럽기에 이렇게 오지 말라고 압력을 가할까’ 궁금한 마음으로 부임했다. 교회에 막상 와서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노량진교회에서 목회 훈련을 받을 때는 교회 안에 사랑하는 형제들만 있는 것 같았다.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할 때는 교회 안에 원수도 있다는 것..
치유하는 교회, 치유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 김의식 목사 간증 (12) 김의식(왼쪽) 목사가 딸 안나(가운데)의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모습. 1998년 1월 호남신학대에 부임했다. 내려갈 때는 유배지로 떠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고향이 좋았다. 강의 전에는 항상 찬양과 통성기도를 했다. 미국 신학대학원에 ‘Seminary is a cemetery’(신학교는 무덤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도 신학대학원에 입학할 때는 뜨겁던 신학생들의 신앙이 졸업할 때가 되면 재로 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생들의 영성에 불을 지피기 위해 강의 10분 전부터 찬양과 통성기도를 하면서 성령님의 불을 붙이는 일에 주력했다. 그러자 다른 교수들의 불평이 터져 나왔다. 신학대가 기도원이냐는 것이었다. 신학대에서도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
치유하는 교회, 치유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 김의식 목사 간증 (11) 김의식(앞줄 왼쪽 여덟 번째) 목사가 지난해 서울 강서구 치유하는교회에서 열린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총장 취임예배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97년 5월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 교인들의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귀국했다. 그런데 뜻밖의 시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교수 임용 1순위로 이사회에 올라갔는데 유력 이사의 조카였던 2순위 후보와 순위가 뒤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배경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신학대 교수도 못 되는가?’ 하고 또 한 번의 상처를 받고 말았다. 그런데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 그 교수의 손위 동서가 내가 한양대를 다닐 때 전도했던 친한 친구이자 공학박사가 된 후 소명을 받고 목회자가 된 최동수 캐나다 밴쿠버 삼성교회 목사였다. 그래서 내 앞길을 막았던 교수를 다 용서하고 화해..
치유하는 교회, 치유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 김의식 목사 간증 (10) 김의식(오른쪽) 목사가 1996년 미국 시카고신학대학원 학위수여식에서 문채성 사모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시카고한인연합교회 목회 시절 기억에 남는 성도는 김진해 안수집사님과 김계자 집사님(현 권사님) 부부다. 남편 집사님은 내가 처음 부임했을 때부터 교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다가 6개월을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 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유방암이 재발해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남편 집사님이 방황하던 6개월이 뇌리를 스쳤다. 부인 집사님을 위해 매일같이 기도하던 중 고난주일을 맞이했다. 집사님의 병세는 더 심해져 암세포로 인해 목뼈와 골반까지 삭아버렸다. 집사님의 엎드린 모습이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다 쓰러진 모습으로 보였다..
치유하는 교회, 치유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 김의식 목사 간증 (9) 김의식(원 안) 목사가 1992년 미국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 위임예배에서 성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목사에게 이민 목회는 눈물의 시간이었지만 잊지 못할 첫 사랑을 경험한 시간이기도 했다. 1989년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후 1년 동안 열심히 일하며 공부한 결과 보스턴대학교(Th.D.), 에모리대학교(S.T.D.), 드류대학교(Ph.D.),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Ph.D.), 시카고신학대학원(Ph.D.)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다른 대학들은 다 목회상담이 전공이지만 시카고신학대학원은 가족치료 전공이었다. 당시 시카고신학대학원은 종합대학병원 3개와 가족치료센터 12개를 가지고 있어서 이론과 실제를 함께 배울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이었다. 그래서 오성춘 장신대 교수님과 상의..
치유하는 교회, 치유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 김의식 목사 간증 (8) 김의식(왼쪽) 목사가 1986년 서울 노량진교회 전도사 시절 문채성 사모, 큰 딸 한나와 함께 휴가를 떠난 모습. 노량진교회에서의 목회가 전부 다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일생에 가장 후회되고 가슴 아픈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내는 내가 심방 전도사이던 시절 나의 유학을 위해 북아현동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같은 동네 3층 옥탑방이었다. 당시 내가 맡은 5교구에는 경기도 외곽에 사는 교인들이 많았다. 새벽 일찍 교회에 가서 승합차를 몰고 심방을 다니다가 저녁 늦게 교회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오후 10시 안팎이었다. 1987년 11월 3일,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던 다섯 살 딸 아이 한나가 “아빠, 해태 종합선물세트 하나 사주면 안 돼요?” 라고 물었다. 그 순간 ..
치유하는 교회, 치유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 김의식 목사 간증 (7) 김의식(왼쪽) 목사가 2008년 림인식 노량진교회 원로목사와 함께한 모습. 김 목사는 1984년 노량진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할 때부터 림 목사를 영적인 아버지로 섬겼다. 1983년 10월 군대 전역 후 봉사할 교회를 찾아 기도를 시작했다. 누나의 시아버지인 김두현 광주 서석교회 장로님이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회계였고 총회장은 림인식 목사님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통해 김 장로님께 림 목사님이 담임으로 계시는 노량진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드렸다. 당시 림 목사님은 한경직 영락교회 목사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셨는데 림 목사님께 장로교 정통 목회를 배우고 싶었다. 아마 총회 임원회가 열렸던 날로 기억된다. 아버지와 함께 총회로 림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아버지는 모처럼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