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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소엽 (2) 인민군, 예수쟁이 낙인 찍어 ‘숙청대상 1호’ 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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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키도 크시고 피부가 유난히 희고 아름다운 분이셨다. 딸 넷이 다 예뻤지만 어머니의 미모에는 미치지 못한다고들 했다. 또한 어머니는 인정 많기로 소문난 분이셨다. 춘궁기가 되면 광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쌀과 보리를 나눠주어 사람들이 자루를 들고 줄을 서서 퍼주는 곡식을 받아들고 연신 절을 하며 돌아가곤 했다. 또 한 달에 두어 번 쌀 한 가마가 들어갈 만큼 큰 시루에 떡을 만들어 동네에 돌리곤 했다. 언니와 나는 떡을 돌리는 일을 좋아했다. 어른들은 떡을 받아들고 고마운 마음을 빈 접시에 담아 보내면서 “예쁘기도 하지”라고 칭찬을 해줬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인정 덕분에 우리 마을은 복음이 잘 전해졌고 그 덕에 우리는 6·25전쟁 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동아일보를 창간호부터 구독하신 분이라 시사에 아주 밝으셨는데 6·25가 나기 1주일쯤 전에 이미 전쟁을 예견하시고 다리가 아파 대전도립병원에 입원한다는 핑계로 고향을 떠나셨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는 전쟁이 나면 흑석리에 사는 당고모 집으로 오라고 어머니와 밀약을 해놓고 떠나셨다.

아버지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6·25전쟁이 발발했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공회당에 끌려가 김일성 충성 노래를 배우고 있었다. 그때 일하는 아줌마가 “애기씨, 큰일났어요. 빨리 집으로 오래요”라면서 나를 업고 나갔다. 밖에 나오자 밤 풀벌레 울음소리가 노랫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희미한 달빛 아래 집 마당에는 없던 말뚝 두 개가 박혀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17세 된 언니가 매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어머니가 묶여 있었다. 내가 아줌마에게 업혀 들어서자 누군가 아줌마 팔을 총대로 쳤고 나는 나동그라졌다. 내 심장이 아줌마 등에서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인민군이 어린 나에게 총을 겨누며 고함을 쳤다. “늬이 아비 어디 갔는지 바로 대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린다.” 나는 그때부터 심장병을 앓게 됐다. 얼마나 무섭고 떨었는지…. 어느새 우리집은 반동분자로 낙인 찍혔다. 아버지께서 면장을 지내셨고 지주였고 어머니는 예수쟁이였기 때문에 미국 앞잡이라고 몰아세웠다. 겉으로 보면 우리는 부르주아였으니 숙청 대상 1호였던 것이다.

인민군들이 방들을 뒤지고 모시를 쌓아 둔 헛간, 이곳저곳을 칼로 쑤셔댔고 천장에 대고 총을 ‘빵빵’ 쏘았다. 어린 내가 본 이 난장판을 그 무엇으로 말하겠는가. 그때의 공산당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내 일생을 지배했다. 나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저 마귀들을 하나님 무찔러 주세요. 엄마를 살려 주세요. 하나님 제발…”이라며 되뇌었다.

일단 그날 밤 무리들은 철수했다. 한밤중에 우리집 머슴이 왔다. 오늘 밤 탈출하지 않으면 내일 공회당으로 끌려나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온 가족을 공개 처형한다는 정보를 알려줬다. 우리는 서둘렀다. 겨우 몇 가지 옷과 식량 조금, 이부자리를 안고 혹시나 개가 짖을까봐 동네 길로 못 가고 산을 돌아 동구밖으로 나갔다. 거기에 달구지를 매어 놓고 머슴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야반도주를 하는 데 성공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것이다. 이미 다른 머슴들은 다 빨갱이가 되어 곡괭이, 삽을 들고 지주들을 쳐 죽였다는 소문도 자자했다. 난리통에도 우리집 머슴은 가족을 도왔고 다 같이 살 수 있었다. 모두 하나님 은혜와 사랑으로 어머니가 베푸신 인정 때문이었다. 우리집 머슴은 행랑채에서 살았는데 어머니는 그를 가족과 다름없이 대했다. 그 머슴의 식구들을 다 배불리 먹여 살리는 바람에 그는 은혜를 잊지 않고 우리를 살려줬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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